[추천방송] SBS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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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방송] SBS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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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8.16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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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스페셜> ‘의거 100년, 대한국인 안중근’ / 16일 오후 11시 10분 

▲ ⓒSBS
안중근의 최후 3년

이것은 동아시아를 쥐고 흔든 이토 히로부미를 단 세 발의 총알로 숨지게 한 무명의 청년에 대한 기록이다. 단지로 의거를 맹세한 서른 한 살의 청년. 무엇이 그를 사지(死地)로 내몰았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토 히로부미라는 거대한 정치인이 동아시아에서 가졌던 지위와 역할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구한말 조선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일본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 때 무명의 청년이었던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안중근의 최후 3년에 주목한다. 그래서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 치기어린 한 청년의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동양 평화를 꿈꾸었던 한 청년이 치밀한 준비와 기다림 끝에 이루어낸 거사임을 이해한다.

삼천리를 등에지고

1907년 5월 22일.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통감으로서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한다. 그것은 내정간섭의 수준을 넘어선 폭거였다. 고종은 같은 해 6월 21일, 헤이그 국제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게 되고, 그것을 빌미로 강제 하야하게 된다. 7월 20일 오전.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텅 빈 양위식. 나흘 후, 이토히로부미는 이완용을 통감 사저로 부르고, 그 자리에서 조약을 체결한다. 정미 7조약이었다. 조약을 근거로 대한제국 군대는 강제 해산되게 되고, 군인들은 저항한다. 북한 진남포에서 학교를 세우고 계몽교육운동을 펼치던 양반가 출신의 안중근은 이 사건들을 지켜본다. 그리고 대한제국 군대의 봉기 사건이 일어난 이틀 후인 8월 3일, 조국을 떠난다.

포로로 대우하라

1908년 6월말과 7월초 안중근이 속해있던 동의회의 부대와 이범윤의 창의회 부대는 국내로 진격, 두만강 하류에 있는 일본 소규모 부대를 궤멸한다. 그런데 7월 19일, 회령 영산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만다. 이는 의병 1만 명이 강을 넘는다는 소문에 대비하여 일본군이 병력을 보강하여 곳곳의 길목을 지키고 의병을 몰아가는 전술을 폈기 때문이었다. 안중근은 우영장으로서 국내의 홍범도부대에 무기를 전달하기 위해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으나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밀림 속에서 초근목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일본군 네 명을 생포하게 된다. 생포한 군인들을 처형시키자는 의병들의 목소리와는 달리 안중근은 그들을 풀어준다. 만국 공법(국제법)으로 그들을 대우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단지로 의거를 맹세하다

러시아의 부호 최재형은 의병전쟁 실패 이후 독립자금을 풀지 않고, 안중근은 독립운동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병합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대륙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1909년 2월 7일 밤. 연추 카리의 여관방에 안중근을 포함한 열두명의 동지가 모인다. 단지 동맹. 안중근은 동의정천동맹이라 이름붙였다. 하늘의 뜻, 동양평화를 실현한다는 의미였다.

일곱 발의 총소리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와 철도 부설권 뿐만 아니라 만주의 관할문제 나중에는 한반도의 병합문제까지 포함해서 협의를 하기 위해 하얼빈 행 열차를 탄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의 목숨은 내가 갖겠으니 내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며, 침착하게 ‘나의 행위는 동양 평화를 위해서이다. 항일 양국 국민이 서로 일치 협력하고 평화를 도모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수대에서 동양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싶다.’ 고 한 그의 이상은 하얼빈역에서 일곱 발의 총소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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