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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따져보기] 홍성일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근대적 위기의 측면은… 소위 ‘권위의 위기’와 관계있다. 만일 지배 계급이 합의를 상실한다면, 즉 더 이상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강압적인 힘을 발휘해 ‘지배하는 것’이라면, 이는 정확히 대규모 대중이 자신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됨을, 그리하여 더 이상 이전에 믿었던 것을 믿지 않게 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위기는 정확히 옛것은 죽어가고 새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 안에 있다.”

우리에게는 헤게모니, 유기적 지식인, 시민사회 개념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위기론이다. 그에게 헤게모니는 지도력(leadership)에 대한 동의를 뜻한다. 폭력이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지도력을 신뢰하고, 그에 동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할 것이다.

이 때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유기적 지식인은 사회로부터 유리된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체현된 지식을 알고 실천하는 존재이다. 그와 같은 앎과 실천 속에서 권력을 갖은 이들이 내놓아야할 것이 무엇인지,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유기적 지식인들은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서울 여의도 KBS 본관 ⓒKBS
시민사회는 이러한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유기적 지식인이 활동하는 곳이 될 것이다. 권력자와 피권력자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매개를 통해 권력은 대화와 협상의 형태로 부드럽게 행사될 수 있다. 위기는 이러한 시민사회의 매개가 오작동할 때 발생한다. 헤게모니의 유통기한이 지나 이전의 합의가 사라졌을 때, 그리하여 옛것은 죽어가지만 이를 대체할 새 것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 그를 매개해야할 시민사회가 무력해 졌을 때, 우리는 극한 충돌과 강압, 폭력의 시대에 놓이게 된다.

현실 속 시민 사회는 다양한 층위를 갖고 있다. 많은 미디어 연구자들은 텔레비전 또한 주요한 시민사회의 장치 중 하나로 간주하는 편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8월 23일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주최한 ‘이병순 체제 1년, 공영방송 KBS 평가 토론회’는 한국의 시민 사회 중 하나인 KBS에 커다란 위기의 징후가 존재함을 보여준 자리였다. 이날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취임 1년을 맞은 이병순 사장 체제 하의 KBS가 헤게모니를 잃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의 리더십은 동의를 받고 신뢰를 얻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과 폭력의 수단을 통해 관철되고 있음을 고발하였다. 시청자의 이익을 대변했던 유기적 지식인, 즉 능력 있는 PD, 기자가 이병순 체제 하에서 징계 받고 좌천 받는 모습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이런 실정에서 KBS가 제대로 시민사회의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음은 당연하다. 많은 이들이 KBS 채널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이전에 믿었던 내용을 믿지 않고 있다. KBS 프로그램 경쟁력 약화와 신뢰도 저하가 가속화되고 있다. 여전히 KBS는 국민의 방송임을 자임하건만, 옛것은 죽어갔고 새 것은 태어나지 못했다.

▲ 홍성일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최근, KBS의 수신료 인상 논의가 일고 있다. 잃어버린 헤게모니를 되찾기 위해서는 일정한 물질적 양보를 내놓아야 하는데, 오히려 KBS는 사회로부터 물질적 양보를 얻으려 하는 모습이다. 그 속에서 KBS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한다. KBS 안과 밖의 유기적 지식인들 사이의 생산적 대화와 지속적 개입이 필요하다. 지금의 KBS의 위기는 낡은 권위를 대체할 새로운 권위를 찾지 못함에 다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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