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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세상읽기]

▲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88만원 세대 저자)
한국에서 총리라는 자리는 약간 애매하고, 하는 역할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김대중 시절 총리를 지냈던 김종필 같은 실세 총리가 생기고, 노무현 시절의 한명숙 같은 ‘허당 총리’가 생겨나고, 또 아예 기억도 하지 못하는 총리들이 수두룩하다. 이명박 정부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케인즈주의자의 직계이고 ‘프린스’라고 불렸던 정운찬이 총리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든지 그가 한 번도 없었던 정말 실세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대통령의 레임덕 기간에 압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국내각’에서의 관리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진 이명박 대통령을 구제하기 위해 긴급 투입된 외부의 인사이기 때문이다.

정운찬이 정치인이든 아니든, 그에게는 서울대라는 자산, 경기고라는 자산, 해마다 수천명씩 졸업하는 경제학자라는 자산 그리고 미국 유학생이라는 자산을 가지고 있다. 좋든 싫든, 정운찬이라면 일단 한 번 접어주고 생각하려는 흐름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것은, 한나라당은 싫지만 민주당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아마도 한국의 70% 이상의 지식인들은 물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자”는 개발주의 시대의 성실한 생활인들의 지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돌덩어리 같은 30%의 한나라당 고정 지지자들 여기에 아마도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정운찬이 가지게 될 개인 지지율 20%를 더하면, 한나라당은 일본의 자민당처럼 된다. 자민당 내에 좌파도 있고, 우파도 있고, 좌우 전환을 자민당 내에서 54년간 했다. 한나라당의 오랜 야망인 일본 자민당식 개편이 지금 진행 중이라고 보인다. 그리고 그 전환의 첫 단추가 바로 정운찬이다. 한신이 ‘토사구팽’을 당했다면, 이는 이재오 같은 가신 그룹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정운찬은 일본 자민당식 연정체계를 위해서 영입한 외부인사이다. 그가 없다면 그릴 수 없는 그림이다.

자, 그렇다면 나는 정운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혹은 그를 통해서 한국의 어떠한 변화를 기대하는가? 우리에게는 신자유주의와 토건경제라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일본은 90년대 엄청난 토건경제를 운용했고, 결국 ‘잃어버린 10년’이 생겼다. 그러나 일본의 신자유주의는 2004년 고이즈미의 우정국 민영화와 함께 등장했다. 일본은 토건경제를 먼저 해체하고, 그 다음에 신자유주의를 맞은 것이다.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같은 국가는 신자유주의는 맞지만, 토건경제는 하지 않았다.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우 토건경제이기는 하지만, 국가가 공산당을 통해서 적극 개입하는 경제이며, 신자유주의는 아니다.

▲ 9월 7일 조선일보 1면
전 세계 역사에서 한국만이 신자유주의와 토건경제를 동시에 추진했고, 앞의 2번의 정권을 통해서, 강화되는 이 특수한 흐름에서 이명박 정권이 등장한 셈이다. 신자유주의 + 토건경제 = ‘공사주의’라고 불러야 할까? 이런 어려운 조건이 정운찬이 다루어야 하는 한국 국민경제의 상황이다. 나는 그가 최소한 토건경제를 완화시키는 일련의 정책틀을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총리가 이미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서 전격적인 거부권을 행사하기는 어렵다. 그는 ‘국무조정’의 권한을 가지고 정책을 ‘튜닝’하는 사람이지, 법을 고치고 행정권한을 전격적으로 행사할 수 없다. 우리 법이 그렇다. 그러나 국정 기조를 바꿀 수는 있다. 매년 정부 업무계획을 짜면서 국정기조를 검토하는데, 총리가 여기에 개입할 수는 있다.

딱 한 가지만 내가 정운찬에게 제시한다면, 총리가 되었을 때, 총리실 산하로 ‘탈 토건경제 해체위원회’ 같은 것을 하나 만들라는 것이다. 4대강, 골프장, 케이블 카, 부동산 거품, 이걸 개별적으로 접근하면 논란만 되고, 초반에 힘이 빠져버린다. 이걸 묶어서 총리가 주재하는 위원회를 만들고, 그 밑에 실무위원회를 두고 여기에 시민단체와 전문가들 그리고 정말로 정운찬식 경제 개혁을 지지할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면 길이 열린다. 정운찬의 국민경제가 민주당보다 더 왼쪽으로 온다면, 민주당도 죽기 싫다면 바뀔 것이다. 민주당 역시 호남 지역에서는 토건경제의 강력한 옹호자일 뿐이다.

한 가지만 더 부탁하자면, 국가 농업에 관한 검토위원회를 하나 더 만들면 좋겠다. YS 시절부터 DJ까지 농업행정은 실종되었고, 노무현 시절 거의 공식적으로 농업정책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한국에 과연 우리의 농업은 어떻게 갈지, 그 고민을 해줄 만큼 힘 있고 선의를 가진 사람은 정운찬 뿐이다. 농촌정책이 아니라 농업정책, 그 해법을 기대한다. 탈 토건과 농업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가지면, 국민경제 내 대부분의 행정 속에 감추어진 흐름들이 보일 것 같다. 정운찬 총리의 시대가 탈 토건경제의 첫 발을 내딛었던 시기가 되기를 정말로 나는 고대한다. 정운찬 총리가 성공하고, 민주당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찾으면, 우리는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선의의 정책 경쟁, 그 시대를 열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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