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자본과 임금덤핑의 두 얼굴을 가진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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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수치가 현대사회 여론조사에서 막강한 권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여기에 이른바 민심(民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통계조사가 ‘경험적 수치’로 입증하기 이전에 민심의 흐름은 이미 정리된 상태이다. 그러니까 통계결과는 이런 흐름을 언제나 뒤늦게 반영한다.

지난달 베를린시가 발표한 지식기반 창조경제부문 통계자료에 따르면 비정규직 PD, 프리랜서가 크게 늘었다. 독일경제연구소(DIW)가 내놓은 베를린 미디어산업현황자료에는 총 18만8,569명의 지식창조문화산업 종사자 가운데 10만1,750명만이 정규직이고 나머지는 프리랜서나 ‘미니잡’ 노동자로 집계됐는데, 지난 2000~2005년 비정규직 증가율은 61%나 됐다.

영화제작에서는 이미 관례가 되어버린 이런 고용관계가 통계수치로 뒤늦게(!) 확인된 셈이다. 또 연방노동청 산업통계자료를 보면 각종 미디어기업의 매출수익이 점증하고 지식창조경제가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결국 비정규직만 대폭 늘어났다.

하지만 베를린은 다른 대도시에 비해 비교적 낮은 물가와 종합예술대학들이 운집해 있기 때문에 ‘잘 나가는’ 젊은 예술가와 학생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도시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 1991년부터 최근까지 18~35세 젊은이들 100만명이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이 도시를 참신하고 창조적인 아이디어, 첨단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만드는 “문화자본”이 되고 있다. 시예산은 파산지경에 처했지만 베를린시가 “가난하지만 섹시하다”는 도발적인 도시마케팅 전략을 내세우는 이유이다.

베를린-브란덴부르크 미디어진흥원(MABB)이 발표한 보고서 <미디어-IT-커뮤니케이션>에서도 젊고 유능한 미디어인력이 넘쳐나는 세계적인 문화예술의 첨단 메트로폴이 바로 베를린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지난 20세기 초반 모더니즘의 도시였던 베를린이 가난한 예술가·학생들로 붐비면서 포스트모던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화국 실험실로 불리는 이곳에서 누구나 자신의 창조적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성공여부는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도 대형방송사들과 UFA, MME 등 대형제작사들이 앞다투어 이곳으로 몰려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고급인력을 저렴하게 이용하기 위한 러쉬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 미디어기업들의 평균 임금수준은 전국권 밑바닥을 맴도는 수준이다. 공공서비스노조 미디어분과에 따르면 베를린과 인근도시의 영화예술대학을 졸업한 촬영기사가 일급 50유로 가량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마저도 제작이 끝나고 나면 실업자 신세를 모면하기 어렵다. 이런 추세가 지난 2년 동안 TV·라디오 방송제작뿐만 아니라 기자·리포터 직종에도 나타나고 있다. 지식창조문화산업의 이면에 이렇게 황당한 임금관계가 작동하고 있다. 모든 프리랜서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지만, 이런 임금덤핑과 노동력착취는 베를린에서 가장 확실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MABB에 따르면 베를린 러쉬 대열의 80%는 중소미디어기업들인데, 지난 2006년 한해에만 60개사가 여기로 이주했고 일자리 2,700개가 추가됐다. 그런데도 베를린시는 유력 방송사들과 대형제작사들의 이전을-큰 물건들만을-집중적으로 홍보해왔다. 이런 지원사격까지 받는 미디어 대자본은 고등교육을 받은 비정규직을 이용하여 ‘꿈의 이윤’을 확실히 달성한다.

▲ 베를린=서명준 통신원/독일 베를린자유대 언론학 박사과정

더구나 자신들을 ‘디지털 보헤미안’으로 간주하는 프리랜서 PD들은 대부분 돈벌이 보다는 자유로운 작업방식에 더 큰 의미를 두는 다소 초연한 사람들이니 대자본으로서는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프리랜서 미디어종사자들은 노동 자체에서-일하면서-큰 기쁨과 의미를 찾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오늘의 자유로운(?) 고용방식에 더 만족하는 진정한 예술가일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윤의-잉여가치의-원천인 그들의 노동력이 심각하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객관적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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