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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4)] 여성 대중음악 뮤지션을 말한다

<여성 대중음악뮤지션을 말한다> 연재기획 순서

1. 여성가수의 음악을 둘러싼 편견들
2. 섹시 댄싱퀸의 존재론 (1): 김추자에서 손담비까지
3. 섹시 댄싱퀸의 존재론 (2): 김추자에서 손담비까지
4. 중성 혹은 남성형 캐릭터들: 피터팬과 톰보이 사이에서
5. 주술자, 사제, 여신, 그리고 뮤즈
6. 다양한 유형을 한 자리에: 여성 그룹 (1)
7. 새로운 세대, 새로운 여성 그룹 (2)
8. 전기기타를 든 여자들
9.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계보학
10. 홍대 앞 여성 뮤지션
11.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들

못생긴 여자

지난 회에 살펴본 유형과 다른, (흔하지는 않지만) 예쁜 얼굴,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비판적 노래들로 시작해보자. 화려한 조명을 받는 무대 앞 미녀 가수의 립싱크를 위해, 실력은 있지만 뚱뚱하고 못생긴 여성(들)이 무대 뒤에서 노래를 한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나 빅마마의 〈Break Away〉 뮤직비디오의 이야기다. 예쁘지 않은 멤버들로 구성된 빅마마와 버블 시스터즈가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여 주목받은 일도 떠올릴 수 있다.

‘깨는’ 모습답게 “가슴이 예뻐야 여자다”(2004)라는 발칙하면서도 진부한 가사를 날린 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얼굴이 못생긴 건 미안하지만 누구보다도 네게 예쁘게 보이고 싶다”(장윤주 1집 〈얼굴이 못생겨서 미안해〉, 2003)는 소망이나, “아무도 모르고 있는 그녀만이 가진 매력 때문에 사랑한다”(윤종신 4집, 〈내사랑 못난이〉, 1995)는 고백은 그나마 소박하고 뻔 한 축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 춘자 2집
조금 ‘세게’ 나온 경우라면 “이 나라의 군인과 사춘기 소년의 환상이 되어” “세계의 평화 위해 어색하게 웃음짓는 고귀한 여성” 미스코리아에 대한 세태 풍자(자우림 3집, 〈미스코리아〉, 2000)나, “좀 더 높은 값에 자신을 시장에 내놓으려 온 몸을 난도질”하는 성형미인에 대한 비판(자우림 5집, 〈실리콘벨리〉, 2004)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접근들 역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에서 그렇게 멀리 나아간 것은 아니다. 가령 춘자의 노래에서 “남자들 가슴으로 안아줄 여자/ 가끔은 가슴으로 울어줄 여자/ 순수한 가슴으로 말하는 여자”라는 이미지는, 여자는 마음이 고와야 하고 남자를 포용해야 한다는 전통적 가치관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자우림의 강도 깊은 비판에는 아쉽게도 왜 여성들이 미모에 치중하게 되었는가 하는 통찰이 없다.

바지 입은 여자

전형화 된 여성성과 다른(혹은 이를 반대하는) 전략들로, 예쁜 얼굴과 섹시한 외모를 비판하는 이상의 시도를 할 수도 있다. 아예 남성적인 캐릭터로 분장/연기하는 것이다. 이를 톰보이형 또는 소년형 캐릭터들이라고 해두자. 이런 유형은 여성적인 면모를 표현/과시하는 유형보다는 훨씬 적은 숫자이기는 하지만, 찾아보기 어렵지는 않다.

우선 많은 경우 여성성의 상징인 긴 머리를 잘라버린다. 리아나 춘자처럼 아예 아주 짧게 깎아버리거나, 숏커트를 보여준다(이런 짧은 머리의 여성은 남성 역할을 하는 레즈비언인 부치를 연상시키지만 성적소수자가 다양하게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 이런 의도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스커트 대신 바지를 입는다. 한때 렉시나 박지윤이 이런 이미지의 음악을 발표한 적이 있다. 4집 〈성인식〉에서 도발적인 관능성을 표출했던 박지윤의 노래 속 여성화자는 (앨범타이틀도 의미심장한) 5집 〈Man〉에서 남자에게 상처 입은 뒤 거꾸로 자신이 “쓰레기 같은 남자”처럼 즐기겠다며 “난 남자야”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난 남자야〉, 2002).

▲ 박지윤 5집 < Man>
렉시는 1집의 〈Tomboy〉(2003)에서 “달라 너의 여자들과/날 봐 내가 먼저 널 버리겠어”라고 호기를 부린다. 이러한 극단적 제스처는 대개 남성의 희생양이 되었던 여자가 행하는 일종의 복수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통해 확실하게 구현된다.” 나는 콧대 높은 여자 시건방진 여자 자신있음 이리 와봐 애송이들아”라는 식으로 자신을 대담하게 표출한다(렉시, 〈애송이〉).

여기에는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강인한 이미지도 합세한다. 특히 여성이 하는 록의 한 현상(혹은 편견)과 접속한다. 마야는 “Tough Girl!”(〈니가 뭔데〉, 2006)이라고 외치는데 이 노래 속 화자는 바로 마야 자신의 분신에 다름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다소 거칠고 보이시한 느낌을 풍기는 남성 로커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온다.

중성 혹은 무성적 접근들

외면적으로 성별 구분이 모호하고 흐릿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남자와 여자 모두의 양상은 비슷하다. 가령 포크 음악은 시대나 스타일별로 차이는 있지만, 인위적이라 여겨지는 전기 증폭이나 왜곡 대신 어쿠스틱 기타 중심의 ‘자연스러운’ 사운드에, 맑고 투명한 목소리를 지향한다. 우리에게 1970년대 포크(나아가 청년문화)가 장발에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요약되었다면, 이는 어쨌든 반전·반문명를 기치로, (성을 포함해) 기성의 가치관과 보수적 이념을 반대했던 히피이즘의 자장 안에 포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 포크의 대명사인 양희은, 포크 그룹 해바라기의 초창기 멤버였던 한영애를 보자. 〈아침이슬〉이 실린 〈고운노래 모음 2집〉(1972) 표지에서 짧은 생머리에 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는 양희은의 모습은 포크 청년문화의 표상 그자체이다. 한영애를 포함한 해바라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긴 생머리, 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청순한 포키는 (한영애의 경우 이후와는 전혀 다른) ‘맑고 밝은’ 목소리를 들려준다.

▲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2집〉(1972)
‘싱얼롱’ 포크송의 고전이 된 대표곡 〈뭉게구름〉 〈구름 들꽃 돌 연인〉 〈여름〉 등 제목에서부터 전원적 서정주의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이 목가적 자연주의자들은 어쿠스틱 기타를 중심으로 (1인적 독백이든 다층적 하모니든) 사람의 목소리를 강조하는 등 옷차림부터 사운드까지 인공성을 배제하고 자연주의적 태도를 발산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전원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접근은 도회적 보헤미안이 꿈꾸는 한 이상향일 뿐이다. 소박하고 건전하기 그지없는, 순수낭만파 포크에서의 목소리는 블루스와 재즈보다 덜 섹슈얼하다. 일반화된 여성성(혹은 남성성)과는 거리가 있고, (남녀 불문하고) 하나의 성으로 수렴되는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다.

히피의 자식 세대인 1990년대 그런지/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도 포크의 성향과 비슷하다. 낡고 찢어진 청바지와 셔츠, 손질하지 않은 머리 등 지저분하고 후줄근한 패션은 바로 단정하고 모범적인 1980년대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동이며, 도회적 보헤미아니즘에 연원을 가진다(록 밴드의 경우는 나중에 보다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일단락하자).

이러한 중성 혹은 무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면, 성별이 엄밀하게 구분되기 이전인 소년기로 역주행(또는 퇴행)하는 것이다. 소년이란 사춘기 이전의 성별이 없는 존재이거나, 양성을 다 가진 존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장에 대한 거부를 하는 ‘피터팬’이 된다는 것은 성인의 섹슈얼리티와 젠더 구분을 회피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소년적 이미지를 가진 가수로, 멀리로는 이선희를, 가깝게는 윤하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경우 ‘보이시한’ 외모가 음악적인 면으로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 같다.

사실 남성적 혹은 중성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여성 음악을 통해 크게 주목을 끌거나 큰 성공을 이룬 사례는 해외의 경우와 달리 그리 많지 않다. 여자 데이비드 보위라 부를만한 수지 수라든가 애니 레녹스, 그레이스 존스 등 외국 여성 뮤지션들처럼 양성구유의 면모를 드러내기는 어렵고,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가면’의 전략이나 ‘복장전이’의 사례도 부재하다. 때문에 최근 한국에서 드라마 속에 자주 등장했던 남장여자 캐릭터가 그런 것처럼, 소재주의 차원에서의 해프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여성 뮤지션 또는 이들 노래 속 화자들이 전형적인 여성성과 좀 다른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차별적으로 보이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일반화된 섹슈얼 아이덴티티의 거부 혹은 해체(젠더 벤딩)로 나아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존의 여성성에 대해 저항 혹은 전복을 하는 듯한 경우에도, 통념화 된 남성적 면모를 그대로 과시하듯 전유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아니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로 포섭되는 양상을 보여주거나.

▲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
게다가 남성과 여성 모두, 상대방의 섹슈얼리티를 역전유하는 현상(부드럽고 아름다운 남자, 강인하고 거친 여자)이 있지만 이런 스위치 현상도 위반적이지 않은 ‘적당한’ 수준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들이 전혀 무의미한 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어떤 면에서는 여성성 혹은 남성성의 바운더리를 확대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하지만 무엇보다 많은 이들은 이런 걸 바라는 듯하다. 꼭 남자가 되지 않고서도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없겠느냐고. 정말이지 양날의 검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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