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 이미지 가수가 버려야 할 조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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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5)] 여성 대중음악 뮤지션을 말한다

<여성 대중음악뮤지션을 말한다> 연재기획 순서

1. 여성가수의 음악을 둘러싼 편견들
2. 섹시 댄싱퀸의 존재론 (1): 김추자에서 손담비까지
3. 섹시 댄싱퀸의 존재론 (2): 김추자에서 손담비까지
4. 중성 혹은 남성형 캐릭터들: 피터팬과 톰보이 사이에서

5. 종교와 신화 사이에서 : 주술자, 사제, 여신
6. 다양한 유형을 한 자리에: 여성 그룹 (1)
7. 새로운 세대, 새로운 여성 그룹 (2)
8. 전기기타를 든 여자들
9.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계보학
10. 홍대 앞 여성 뮤지션
11.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들

섹시한 여성성을 극대화하거나, 이와 반대로 강력한 남성적 캐릭터를 닮는 방식 이외에, 여성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모형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한 저술에는 두 가지 예가 제시되어있다. 첫째, 마녀(witch) 같은 신화적인 캐릭터가 있다. 둘째, 신비로움을 간직한 원형, 예컨대 바다, 달, 대지 등의 자연과 연결되는 대지모(earth mother) 혹은 자연모(Mother Nature)의 상을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둘 역시 문제점이 있다. 첫 번째는 비이성적이며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여성의 스테레오타입을 고착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는 본질주의의 오류, 그러니까 여성이란 본래 생물학적으로 자연과 연관된 존재라고 전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제의적 주술사, 신화적 마녀 사이에서

먼저 마녀처럼 권위와 파워를 가진 원형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주술사나 제사장 같은 종교적 유형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범주들은 섹시형 팜므파탈과 중첩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범접하기 어렵고 두려운 대상이 된다. 이런 유형으로, 단순 비교이기는 하지만 서양에 피 제이 하비(P. J. Harvey)가 있다면, 우리는 한영애를 손꼽곤 한다.

한영애라면 포크, 블루스, 록, 테크노, 국악, 트로트 등 다양한 음악장르를 통해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획득한 여성 보컬리스트이다. 먼저, 1970년대 후반 해바라기와, 1980년대 이후 신촌블루스 및 솔로 활동에서 한영애는 대조적이고 이질적인 두 가지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전자에서 포크, 후자에서 블루스를 지향했는데, 포크 양식을 통해 대자연에 대한 동경과, 이로부터 자연스러운 중성성(혹은 무성성)을 드러냈다고 한다면, 거칠고 분방한 블루스 양식을 통해 범접할 수 없는 제사장(혹은 마녀)의 이미지를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

한영애를 여제사장 혹은 주술사로 비유하는 일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양한 장르를 엮어내는, 파워풀하고 허스키한, 다소 낮은 음역의 탁성은 한영애를 대표하는 보이스컬러일 것이다. 그 가운데, 판소리나 연극 혹은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말하는 듯한 창법은 일면 사제의 주문 같기도 하다(3집 〈조율〉 〈말도 안돼〉 등). 경건하면서도 이국적이지 않은가. 때로는 도발적인, 때로는 제의적인 화장과 복장, 그리고 퍼포먼스와도 같은 공연을 통해 모성과 관능성, 또는 주술성이 혼융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테크노(5집, 1999)나 트로트(〈Behind Time〉, 2003) 같은 극과 극의 장르/스타일의 결탁도 눈에 띈다.

그런데 테크노/일렉트로니카 음악은 어쩌면 제의적인 주술성이 잘 현현되는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하위장르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띠겠지만, 많은 경우 단조로운 전자음의 무한반복은 몽환적이고 최면적인 도취의 순간으로 우리를 안내하곤 한다.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황홀경이나, 쾌락적인 영성(스피리추얼리티)과 일별하는 것이다. 일부 테크노 문화(이른바 레이브)에서는 ‘디지털 샤먼’으로 군림한 DJ와, 원시 이교도의 군무를 추는 듯한 참여자들에 의해 이른바 ‘테크노샤머니즘’이 구현되지 않았던가.

▲ 가수 이정현
그런 점에서 한때 ‘테크노 무당’ ‘테크노 여전사’로 불렸던 이정현을 떠올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녀의 초기 음악들은 신들린 듯한 춤과 열렬한 노래를 통해 ‘무(巫)끼’와 친화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1집의 〈와〉(1999)에서 한 손에는 새끼손가락 마이크를, 다른 한 손에는 부채를 들었으며, 비녀를 꽂고 사제복처럼 길게 치렁거리는 차림을 했는데, 이는 이색적이다 못해 이국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기(神氣)는 음악의 실질적인 내용과 깊이 관련된다기보다 비주얼과 특히 관련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정현의 뮤직비디오와 공연 무대의 퍼포먼스는 (대중음악계에 흔히 나타나는 ‘퍼포먼스형’ 뮤지션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독특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을 품어 귀기마저 감도는 인어공주(〈바꿔〉, 1999)부터, 이집트 왕녀(〈너〉, 2000), 최근에는 마리앙뜨와네트(〈Avaholic〉, 2009)까지 이정현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앙칼진 목소리, 주문과도 같은 래핑, 외국 악기의 사용 등의 주술적 장치로는, 이국적 무드 이상의 전면적이고 직접적인 제의적 분위기를 낚을 수는 없다(이와 비슷하게, 그룹명부터 명시적인 샤크라도 이런 이국성을 드러냈지만 역시 이정현과 마찬가지의 전철을 밟았다).

테크노의 관계도 마찬가지. 이정현은 제의적 분위기에 힘입어 ‘동양적인(또는 한국화된) 테크노’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지만, 그녀의 음악을 본격적인 테크노 음악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대개 디스코의 후예들인 하이에너지(Hi-NRG)나 하우스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이른바 ‘뽕끼’가 가미된 ‘댄스가요’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대중가요처럼, 연인의 배반이나 예기치 않은 이별에 대해 비애나 분노를 표출하는 내용이 반복되었다. 이런 것들을 폄하하자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반복적 내용이 아니라 이를 구현하는 방식에 있다. 1999년 말 무렵 ‘가요’계에 불어 닥친 테크노 열풍이 그녀의 새끼손가락 마이크와 ‘도리도리 춤’으로 요약된 것처럼 외면적인 스타일 차용에 그친 감이 있다. 누군가 그랬던가.

“이정현의 음악이 테크노라면 〈삼바의 여인〉도 삼바이고, 〈다함께 차차차〉도 차차차”일 뿐이라고. 이에 대해서는 앞서 거론했던 것처럼 가요화 혹은 토착화된 테크노라거나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적용이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긴, 이는 바로 우리 대중음악에서 흔히 나타나는 생존방식의 하나가 아니던가. 이정현은 그런 점에서 그 자체로 전형적인 클리셰이다.

무국적의 탈속화한 여신상

요정, 여신 같은 신비한 이미지는 우리에게 조금 더 익숙하다. 김연아 같은 십대 스타를 두고 서슴지 않고 ‘요정’이라 칭한다. 수많은 아이돌 소녀그룹과 어린 여성 보컬, 그리고 록 밴드의 프론트우먼의 이미지도 여기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 요정, 나아가 여신의 이미지는 뇌쇄적이고 관능적인 섹슈얼리티와도 거리가 있지만, 거칠고 강력한 (남성 또는 소년 같은) 여성과도 거리가 있다. 요정이란 성장적 이미지이다. 어린 소녀에서 성인 여성으로 향하는 과도기적 캐릭터인 셈이다. 둘째로, 이들은 현세와는 다소 동떨어진 동화나 신화 속의 캐릭터인데 물, 달, 땅 등의 자연의 이미지와 닮아있기도 하다. 이 역시 과정적/경유적/중도적 이미지이다. 여기 속세를 떠났거나 현세와 거리를 두면서도 이곳을 통해 존재하는. 앞서 이야기했지만 이런 이미지들은 여성(성)을 신비화하는 또다른 버전으로 읽히기도 한다. 정서적이며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신화속의 여신에서 본따 흔히 ‘뮤즈’를 칭하는 것처럼.

1988년 데뷔 이래 최근까지 꾸준히, 그리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여성뮤지션 이상은의 경우를 여신이라는 이미지와 결탁시켜보려 한다. 이제 그녀는 20여년 전 머슴아 같던 아이돌 시절을 거부할 만큼 진정성과 예술성을 담지 한 아티스트로서의 자의식으로 충만하다. 단적인 예로, 일본인 프로듀서 하지무 다케다와 동승하기 시작한 6집 〈공무도하가〉(1995), 도일(渡日) 및 개명(改名)과 함께 당도했던 8집 〈Lee-tzsche〉(1997) 및 9집 〈Asian Prescription〉(1999)이 있다. 이 음반들을 통해 국적불명, 현세초월의 ‘아시아 여신’으로 추앙받았고, 방랑하는 ‘코스모폴리탄 보헤미안’의 첨병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러한 경향을 완화 혹은 반복하여 계속 재생산하고 있다(이는 그녀 자신의 여러 저술과 글들을 통해서도 재확인된다. 13집의 경우도 한일 공동 합작 프로젝트 형식이다).

▲ 가수 이상은 13집 'The 3rd place'
이상은의 9집 타이틀을 빌면 그의 ‘아시아(적) 처방’은 오리엔탈리즘적이다. 동양인이 스스로를 타자화하여 서양적 시각으로 재전유한 ‘조제’이다. 명상적이고 선(禪)적인 동양적 면모와 뉴에이지 같은 서양적 풍미를 접합했다고나 할까. “녹차에 버터를 섞어”(〈Green Tea Party〉) 파티를 여는 “라임그린 시폰 스카프”를 한 이 여신은 영어로 한국어를 표기하거나(가령 〈Ogiyodiora〉나 〈Gongfuin〉), 영어 가사로 민요풍 노래를 부르는데, 이는 동양이나 서양,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국적 분위기를 제시할 뿐이다.

나아가 ‘이 좁고 우스운 땅에 내려오지 말라’(〈새〉)고 전언한다. 결국 국가나 가족, 육체와 같은 기호들은 삭제되어, 실체 없이 부유하는 상징으로 가득하다. 그런 점에서 탈여성적(혹은 무성적)인 유목적(?) 보헤미아니즘을 설파하는데, 이도 결국 도회적이고 여피적인 상상력의 소산일 따름이다. 이상은의 작가 또는 예술가로서의 지위는 이렇게 획득된다.

최근에는, 낯설고 범접키 어려운 상상계가 아닌 현실계를 지목하기도 했다. 12집 〈Romantopia〉(2005)은 ‘홍대앞’이 설정되었고, 13집 〈The Third Place〉(2007)는 ‘오키나와’를 근거지로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실제의 공간과 거리가 있는 탈속적 세계에 가깝다. 12집에서는 ‘지도에 없는 마을’ ‘로만토피아(낭만적 이상향)’를 건설하더니, 13집에서는 전설과도 같은 홍길동의 율도국과 오키나와를 연결짓는다(〈바다여〉).

▲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
나아가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닌 또 다른 곳이 있다”(〈제3의 공간〉)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또한, 전통악기를 동반한 뉴에이지적 풍취의 민요로 “지구 어딘가의 숲이 고향의 어머니처럼/.../엄마처럼 부드러운 하늘/공기, 마음 노래, 바다, 숲으로 돌아가”(〈Eco Song〉)자는 환경생태적 전언을 전달하며 대지와 자연에 대한 숭배를 그려내고, 여피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 방랑자로서 그는 삶을 여행으로 치부하며 “영원을 향한 여행 떠나리”라고 결의한다. 이렇게 현실 속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떠나야만, 그리고 국적과 성별까지 소거해버려야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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