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 코미디가 된 전임자 임금지급
상태바
국제적 코미디가 된 전임자 임금지급
[시론] 이정호 민주노총 정책국장
  • 이정호 민주노총 정책국장
  • 승인 2009.11.10 1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정호 민주노총 정책국장
“내년부터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되면 한국의 노동계는 앞으로 해외에 나가 한국의 전임자제도를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지난 8월 한 법학 교수는 ‘전임자 임금’제도를 둘러싼 노사쟁점을 다룬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정부의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방침이 알려진 직후에 가진 토론회였다. 노조 간부 한 명이 토론회 끝자락에 이 교수에게 “교수님은 우리 편이지만 정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답변에 앞서 이 교수는 “저는 노조 편이 아닙니다. 진보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학자적 양심을 그대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는 지난 9일자 1면에 <노조 전임자 임금 준 기업 명단공개하고 사법처리>라는 제목의 머리기사를 실었다. 노동부가 내년부터 노조 전임자에게 임금을 주는 기업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그 명단을 공개하기로 한 사실을 소개했다. 특히 적발되는 사용자는 반드시 2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사업처리하고 처리결과를 전산에 입력해 공개한다는 거다.

같은 날 양대노총은 ‘노조전임자의 위상과 국제기준에 관한 국제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에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노동조합자문위원회(TUAC) 롤랜드 슈나이더 선임정책자문위원과 국제노총(ITUC) 국제노동기구(ILO)기준 담당인 스티븐 베네딕트씨, ILO 방콕사무소 노동기본권 담당인 팀 드 메이어씨가 토론자로 나왔다.

토론회 사회를 맡은 이광택 국민대 교수는 아침에 나온 중앙일보를 들고 나와 펼쳐 보이며 말문을 열었다. “이 신문이 영문판으로 나와서 배포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 중앙일보 11월9일자 1면
롤랜드 슈나이더는 “여기 와서 한국이 노조전임자에게 임금을 주는 유일한 나라라는 한국 정부의 주장을 듣고 놀라울 뿐”이라고 했다. 스티븐 베네딕트는 “전임자 임금은 여러 노사협상의 주제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법으로 금지하고 허용하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했다. 베네딕트는 지난해 한국에서 통과된 필수공익사업장의 필수유지업무제도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이 조문이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에 들어가 있는 점을 비꼬아 “유머감각이 풍부한 한국 정부의 관료가 법명에 ‘조정’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 같다. 이렇게 노동기본권을 공격하는 법에 ‘조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 우습다”고 했다.

이렇게 국제노동기구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 나와 법으로 전임자 임금을 금지하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는 한 목소리를 내는데도 정부는 안하무인이다. 노동부는 토론회가 열리는 당일 오전에 <전임자 급여지원 금지, ILO 기준에 전적으로 부합>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귀를 닫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표명했다.

같은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을 놓고 이렇게 다른 정반대의 해석을 내릴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ILO는 전임자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거나 반대로 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명시하지는 않는다. 노사가 협상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법이나 기준으로 지급 또는 지급 금지를 강제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이런 문제를 법 조문으로 억지로 끌어다 놓고 법으로 강제하겠다고 한다. 이런 상황 자체가 국제적 코미디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노동계는 노동법에 전임자 임금 지급을 명시해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노사 자율로 협의해 결정할 문제를 법으로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입법권의 과도한 남용이다.

백번 양보해, 도덕으로 비난할 문제를 외국의 사례까지 억지로 왜곡해 법과 제도로 비난하면서 노조때리기에 혈안인 조중동의 보도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