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라이어티와 농촌, 그리고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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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라이어티와 농촌, 그리고 소녀들
[김고은의 예능의 정석]KBS 〈청춘불패〉
  • 김고은 기자
  • 승인 2009.11.30 1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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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은 예능의 오랜 무대다(어촌, 산촌 등을 총칭해 편의상 농촌 또는 시골이라 하자). 탁 트인 자연을 배경으로 하니 그림도 좋고, 도시에서 나고 자랐을 법한 스타들이 시골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 짓는 일부터 헤매는 모습이라니,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그래서 SBS 〈패밀리가 떴다〉는 시골을 찾고, KBS 〈1박2일〉도 종종 농촌체험에 나서며, MBC 〈무한도전〉은 직접 농사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 농촌체험을 내세운 프로그램 하나가 추가됐다. KBS 〈청춘불패〉(기획 김호상)가 그것이다.

▲ KBS '청춘불패'의 출연진. 노주현, 남희석, 김신영, 김태우 등 'MC군단'과 걸그룹 멤버들로 구성된 'G7' ⓒKBS
‘아이돌, 신 귀농일기’라는 콘셉트의 〈청춘불패〉는 강원도 유치리 한 마을에 ‘아이돌촌’을 꾸려 출연자들이 직접 손으로 일구고 가꾸는 ‘자급자족’ 생활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다른 버라이어티와의 차이라면 노주현, 남희석, 김신영, 김태우 등 ‘MC군단’을 제외한 출연진이 ‘걸그룹’ 멤버들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소녀시대의 유리와 써니를 시작으로 카라의 구하라,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나르샤, 포미닛의 현아, 티아라의 효민, 시크릿의 선화 등 한국을 대표하는 걸그룹이 다 모였다. 무대 위에선 별처럼 화려하고 꽃처럼 아름다운 ‘그녀’들이 고쟁이를 입고, 무릎까지 장화를 올려 신은 채 콩밭을 매고 진흙탕에 뒹구는 모습이라니. 생각만 해도 흥미롭다.

지난달 23일 ‘걸그룹 숙소 습격’ 오프닝을 통해 ‘소녀’들의 민낯을 공개하는 것으로 시작한 〈청춘불패〉는 지난 27일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겹치기 편성 덕을 본 때문인지, 방송 6회 만에 두 자리 수 시청률을 기록하는데 성공했다.

캐릭터도 제법 자리를 잡았다. 뭐든지 하라는 대로 한다고 해서 ‘하라 구’라는 별명을 얻은 구하라, 나이 서른을 바라보는 맏언니 ‘성인돌’ 나르샤, 했다 하면 편집된다고 해서 ‘통편녀’라는 오명을 얻은 효민까지. 일부 억지스러운 감도 없지 않지만, 리얼 버라이어티의 생명과도 같은 캐릭터 구축에 신경을 쏟는 편이다.

소녀들은 ‘찰랑찰랑’, ‘밤이면 밤마다’ 같은 성인가요를 덩실덩실 춤과 함께 불러대고, 입으로 무를 갈거나 ‘엽기 뽀뽀뽀’를 부르며, 다리를 찢다가 뒤로 벌렁 넘어가기도 한다. 이들은 예상 외로 모든 일에 열심이고, 망가지기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캡처가 되어 인터넷에 떠돌아다닐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망가짐의 대열에 합류한다.

제작진은 끊임없이 ‘유치리 대표 홍보대사 선발대회’, ‘미스메주선발대회’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주며, 그 안에서 기꺼이 망가지는 소녀들의 모습을 대견한 듯 바라본다. 그래서 시선이 가지만, 현재로선 그게 〈청춘불패〉가 보여줄 수 있는 전부라는 생각이다.

언제나 화기애애하고, 명랑한 소녀들은 자잘한 웃음을 꾸준히, 그리고 때로는 제법 큰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재미를 주지는 않는다. 마치 주인공만 일곱 명인, 고만고만한 에피소드식의 코미디 영화를 보는 기분이랄까.

이를테면 〈패밀리가 떴다〉에서 이효리는 여성 출연자를 언제나 경계하고, 아침에 얼굴이 부은 정도로 ‘굴욕’을 당하기도 하지만, 〈청춘불패〉에서 소녀들은 일제히 망가지고 언제나 화목한 덕분에 그런 긴장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태우-유리의 다소 억지스런 ‘러브라인’도 마찬가지다.

결국 〈청춘불패〉에는 늘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얼굴에 진흙을 묻혀도 예쁜 소녀들만 있을 뿐이다. 그나마 무대 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군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는 ‘성인돌’ 나르샤가 소금 역할을 해주는 편이다.

▲ '청춘불패'에서 소녀들은 기꺼이 구르고 망가진다. ⓒKBS
가을의 끝자락에 시작한 〈청춘불패〉는 이제 농한기를 맞고 있다. 강원도 유치리 ‘아이돌촌’에도 겨울이 찾아오고, 김장까지 끝낸 ‘G7’의 일감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G7’은 이제 그 많은 시간은 무엇을 하며 보낼까. ‘농촌체험’을 하자니 시기가 애매하고, 망가지고 대결하기를 반복하자니 ‘7걸 일촌 운동’이란 기획의도가 생뚱맞다.

결국 〈청춘불패〉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걸그룹 멤버들의 ‘자급자족’ 생활보다 그저 소녀들이 농촌을 무대로 해맑게 웃고 망가지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이제 6회까지 방송됐을 뿐이니, 섣부른 판단은 무리다. 지상파 방송의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부분 남성들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소녀’들을 내세운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서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희망적이다. 하지만 〈청춘불패〉가 그저 소녀들이 예쁜 그림과 ‘착한’ 에피소드만을 만들어내는 예능프로그램이 아닌, 특색 있는 리얼 버라이어티로 자리 잡기 위해선 그녀들의 관계, 그리고 그 이상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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