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PD의 눈]이채훈 MBC 〈W〉 PD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하던 시절, 사람들은 태양의 소중함을 알았다. 씨 뿌리고 추수하는 일은 태양의 주기와 일치했다. 농경사회의 우리 선조들은 이 점을 모두 알고 있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도 태양은 여전히 위대하다. 예나제나 사람들은 햇빛이 얼어붙은 겨울에는 봄을 그리워했고, 햇살 뜨거운 정오에는 삶의 정점을 노래했다. 에집트, 아즈테크 등 고대문명은 물론 일본, 북측 등 가까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하게 여기는 인물을 태양에 비유해 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새해의 소원을 비는 것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자연스럽다. 연말연시, 해맞이 명소가 심심찮게 TV에 소개된다. 잘 알려진 곳들은 너무 붐비니 동네 가까운 곳의 숨겨진 명소를 찾아가라고 권하는 프로그램도 나온다. 가령, 서울 사는 사람은 지하철 한번으로 아차산 정상, 상암동 하늘공원을 찾아가도 좋고 한강 유람선을 타도 좋다는 것. “해는 어디에나 있다”는 친절한 멘트도 들려온다.

연말연시가 뭔가. 지구가 태양 주변을 한 바퀴 돌았고, 새롭게 한 바퀴 돌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하루라는 게 뭔가. 내가 발딛고 선 지구 표면이 태양을 마주보기 시작하면 아침이고 태양빛이 나에게 그늘을 드리우면 밤이다. 생리현상이라고 여기는 잠조차 지구의 자전 주기와 일치하도록 훈련된 결과일 뿐이다.

태양은 우주를 이루는 10억 제곱 항성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니 태양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우리 인간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태양은 물론 유한하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태양 없이 존재할 수 없었고, 태양보다 인간이 먼저 소멸할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태양의 흑점이 조금만 커져도 가뭄에 몸살을 앓는 우리 인간은 진정 박테리아보다 더 작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태양신께 감사하며 예를 표하는 것이 온당하다. 인격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믿음에 비하면 태양신 숭배는 결코 비이성적인 게 아니다.

초등학생도 다 아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이 자명한 진리를 잊고 살아간다. 태양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우리 인간은 좀 더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아야 마땅하다. 주위를 보자. 사람 뿐 아니라 지구 위의 모든 동물들, 꽃과 나무들도 태양의 주기에 맞춰서 살다 죽어간다. 우리가 자연의 섭리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은 태양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살다가 죽어가는 지구 위 모든 동식물의 본성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 동물들, 식물들은 별개의 존재처럼 보이지만 함께 살다 죽어서 흙이 되면 서로 섞일 똑같은 존재들이다. 인간은 자기의 작은 모습을 느끼며 겸손하게 살 때 비로소 위대하고 경이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 이채훈 MBC 〈W〉 PD
우리는 모두 지구 표면에 붙어서 자기 나이만큼 태양 주위를 돌았다. 태양 주위를 70번 가까이 돌고서도 여전히 태양의 위대함을 모르는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원전 수출의 경제적 효과에는 환호하지만 억울하게 죽어간 용산참사 희생자의 죽음에는 1년 내내 냉담하다. 결식 아동 예산을 삭감하면서 멀쩡한 강바닥을 파서 나라 예산을 고갈시킨다. 이들은 소박하게 태양에 감사하며 살기는커녕, 예수를 입에 달고 살면서 매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자기와 같은 인간 소중한 줄 모르는 이들이 자연과 공존하기 위해 노력할 리 없다. 탐욕과 집착과 위선에 사로잡힌 이들을 보면, 부자 천국 가는 게 낙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성서 구절이 저절로 떠오른다.

하지만 새해, 넉넉한 태양은 이들에게도 여전히 빛을 보낼 것이다. 태양만큼 넉넉하지 못한 나는 이 부자들보다 더욱 빛이 절실한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본다. 해야, 솟아라, 어서 솟아서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를.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기를. 우리 방송인들에게도 힘과 용기의 햇살을 던져 주기를...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