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수상자’ 해외 연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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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우리들 누이의 나라

|contsmark0|문학을 하는 이들은 베트남을 일러 ‘누이의 나라’로 즐겨 일컬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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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우리들 열 일곱의 pd상 수상자들은 호치민(옛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발을 내리는 순간부터 시집간지 처음 누이네 집에 찾아온 친정 오라버니처럼 집 마당이며 세간들을 눈치껏 둘러보기도 하고 코를 벌름거리며 부지런히 냄새를 맡았습니다. 확실히 베트남은 우리들 누이의 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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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6|그렇기에 우리들의 여정(旅程)은 누이를 확인하고 그 살가운 우애를 통해 우리들 자신의 정체성을 살피는 나날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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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9|통일되기 이전에 각각 양쪽의 수도였던 남쪽의 호치민과 북쪽의 하노이, 그리고 호치민에서 멀지 않은 메콩델타 지역과 하노이 쪽의 ‘하롱베이’가 우리가 둘러본 대표적인 지역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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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2|베트남의 2대 도시와 그들이 자랑하는 빼어난 자연 경승지(景勝地) 두 곳이 다 망라된 셈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의 출장 목적이기도 했던 베트남의 방송사까지 다 시찰할 수 있었으니까 우리 중에 여한이 있는 이가 있을 리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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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5|호치민과 하노이 두 도시가 다들 우리 누이라면 호치민은 이제 막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입술도 바르기 시작하는 큰누이, 그리고 하노이는 아직 얼굴빛조차 파리하고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듯한 작은누이로 비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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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8|사이공을 호치민으로 개칭하면서 혼란이 없지 않습니다만 자본주의를 경험한 호치민시는 그만큼 시장 경제적인 측면에서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타는 오토바이처럼 소란스러운 데다가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구요. 하노이는 상대적으로 가라앉아 있었고 순박했으며 잘 정제돼 있다는 느낌을 안겨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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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1|아, 그 흰옷의 아오자이는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은 벌써부터 아오자이를 벗어 던지고 청바지를 입기 시작했지만 베트남의 모든 여고생들에게 교복은 아직도 아오자이라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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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4|그래서 아오자이 여고생 행렬이 지나가면 우리는 차를 멈추고 우르르 달려나가 함께 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무리 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 더도 덜도 말고 그냥 한 다발의 하얀 꽃무더기였습니다. 그게 혹시 우리 전통의 복색(服色)이었던 흰옷에 대한 향수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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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7|사람마다 떠나지 않던, 결코 과장되지 않은 융숭 깊은 그들의 미소는 상기도 우리들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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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0|우리가 말 한 마디라도 앞서 건네다 보면 그들은 하루의 피곤함이 천근만근 어깨를 짓누를 저녁시간에도 예의 그 미소를 어김없이 보여주곤 했거든요. 영락없이, 착한 우리네 누이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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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3|메콩델타의 풍요로움이나 유장함, 그리고 여러 영화에 선보인 바 있는 ‘하롱베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히 덧붙일만한 게 따로 없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을 새기고, 그리고 자연의 위대함에 매료되어 감탄하다가 한순간에 온통 넋을 빼앗기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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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6|한때는 거의 모든 이들이 자전거를 탔다는데 이제 그것들이 오토바이로 바뀌어 있는 풍경도 장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머잖아 그것들은 승용차로 변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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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9|그래서 베트남도 이른바 세계화의 길에 점차 합류할 테고, 우리 오빠들이 여유를 잃은 채 날로 각박해지고 있듯이 그들 또한 순박함도 미덕이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거나 아오자이에 대한 애정도 식어지는가 하면 그들 특유의 미소도 얼굴에서 차츰 굳어져 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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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42|누이들 역시 오빠들이 지나온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쓸데없는 기우(杞憂)겠으되 그게 베트남에서 유일했던 우리 안타까움이고 또 가슴의 서늘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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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45|베트남의 방송 역시 우리의 누이였습니다. 드라마는 부정부패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내용들이며 사회주의적인 주제를 띄고 있는 내용들이 주조를 이루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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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48|어린이 프로에도 토론을 가미하고, 우리네 <장학퀴즈>식의 프로그램도 인기였습니다. 연말 장원을 차지한 학생들에게는 한국 유학의 특전이 주어진다고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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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1|우리가 형이나 오빠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안고 살았듯, 한국 드라마나 탤런트들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식을 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일거수일투족마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었겠어요? 적어도 그들의 땅에서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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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4|다만 우리가 스스로 내팽개치거나 어언 잃어버린 착한 심성들, 그게 베트남에는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걸 확인하거나 되찾고 싶은 프로듀서들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곳으로 떠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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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7|어린 시절 해질 무렵, 풀숲에서 놓치고 찾다찾다 그냥 돌아와 버린 구슬처럼 베트남에서는 그게 아직도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기다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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