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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의 영화이야기]

▲ MBC FM <이주연의 영화음악> 진행자, 이주연 아나운서
원래는 숙직이라 느지막이 출근해도 되는 여유 있는 날이었다. 청소를 하고 미뤄둔 빨래를 하니 오, 상쾌한데~ 기분까지 빨랫줄의 빨래처럼 하늘하늘하니 가벼웠다. 병원에 가신다는 엄마의 말씀에 모시고 갈 때까지만 해도 오랜만에 효도하는 것 같아 흐뭇했다. 그런데 병원은 아픈 환자들로 넘쳐났고 (세상에 관절이 안 좋은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니!)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는 동안 휴대전화는 수없이 울려댔다.

이런저런 일로 약속을 잡느라, 보호자로 의사 선생님 설명 듣느라 정신은 이미 안드로메다에. 결국 병원 문을 나섰을 때는 이미 오후가 반도 더 지나있었고 몸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트러블 때문에 꼭 피부과에 들러야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피부과에서까지 역시 오래 기다리고 나니 병원 두 군데 들른 것만으로 하루해가 다 가버렸다. 아, 이 허무함... 게다가 허둥지둥 준비를 하고 출근하는 길에 떠오른 사실, 오늘은 2주일마다 돌아오는 원고 마감일이다. 생각해둔 주제도 딱히 없는데 벌써 마감일이라니! 이건 뭐,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한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게 아니었나 싶다.

세상에 의미 있는 혹은 결정적인 혹은 시시한 하루는 얼마나 존재할까. 한 달 후 시험일까지 남은 30일의 하루들, 4년 동안 열심히 준비한 기량으로 최고의 선수들과 겨루는 동계 올림픽에서의 하루, 일어나서 밥 먹고 출근해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똑같은 일상의 하루, 이런 하루, 저런 하루...

<어느 멋진 날>의 멜라니와 잭도 바쁜 아침이었다. 둘 다 직장일로 정신없는 날. 하지만 아이들이 있는 싱글맘, 싱글파더는 우연한 기회에 부딪치게 되고 계획대로 아이들을 소풍에 보내지 못하자 일과 함께 아이도 봐야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급한 대로 각자 되는 시간에 서로 아이를 봐줘야 하는 두 사람. 아이 둘을 보는 동안 한 아이를 잃어버리는가 하면 똑같이 생긴 휴대전화를 바꿔 가져가더니 회사에서의 프레젠테이션은 엉망이 되고 중요한 증인은 약속시간에 늦게 나타나고 만다. 계획한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고 예상했던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앞일이라고 했던가. 서로 빈정거리며 상처 주는 말만 했던 두 사람. 하지만 그렇게 되는 일이 없었던 그 하루 동안 두 사람은 상대를 이해하게도 좋아하게도 됐다. 역시 알 수 없는 사람의 일.

▲ 영화 <멋진 하루>

그런가하면 여기 비슷한 제목의 <멋진 하루>라는 영화도 있다. 희수는 헤어진 지 1년 만에 병운을 찾아간다. 찾아가 건넨 첫마디는 “돈 갚아.” 나이는 들고 애인은 없고 직장도 없으니 돈도 없는 여자가 떼인 돈 350만원을 받기 위해 1년 만에 애인을 찾았고 돈을 마련하러 여기저기 헤매는 남자와 동행하게 된다. 남자는 돈도 없고 심지어 집도 없이 여기저기 떠도는 신세지만 뻔뻔함에 능구렁이 같은 성격까지 갖추고 있어 여기저기 참 잘도 빌붙어 지낸다. 한때는 사랑했던 남자와 함께하는 여자에게는 참 불편한 하루다.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돈은 조금씩 채워지고 시간도 조금씩 채워지는 하루. 제목만큼 그들에게는 정말 ‘멋진 하루’였을지.

‘멋진’ 하루라는 제목이 붙은 두 편의 영화 속 남녀는 서로 으르렁대기 바쁘다. 정신없이 허둥대는 사이 일은 잘못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하루가 끝날 때쯤 두 사람 사이의 기류는 두 영화가 사뭇 달랐다. 사랑에 빠지거나 사랑에 실망하거나... 그렇지만 나는 결국 두 영화의 하루가 끝날 때쯤 네 사람이 느낄 궁극의 감정은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 하루가 끝났다는 피로와 안도감, 또 다른 하루가 올 거라는 희망과 설렘. 잠자리에 드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된 몇 안 되는 평등한 원리. 하루가 저물고 또 다른 하루가 열린다는 것. 숙직의 하루가 지나간다. 이제 안도감에 잠들 시간이다. 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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