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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김진혁 EBS PD

처음부터 맨 앞에서 치고 나오는 이정수와 성시백과 달리 이호석은 매번 맨 뒤에서 출발해서 엄청난 스피드로 치고 나온다.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이처럼 가장 드라마틱한 경기 운영을 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신감은 올림픽 중계방송이 있는 1달여간을 제외한 나머지 4년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얼음 위에서 그가 흘렸던 ‘땀’ 때문일 것이다.

▲ 조선일보 2월22일자 1면
공부의 신을 보며 ‘천하대를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당신들이 꼴찌들의 아픔을 아느냐고, 그러니 어떠한 방식이든 자괴감을 털고 일어서는 ‘꼴찌의 반란’이 감동적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다가도,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니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메달을 하나라도 더 따야 한다는 생각 앞에선 그 땀을 간단하게 무시해 버린다. 세상이 불합리하다고 투덜대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극복해서 당당하게 세상을 바꾸라면서 막상 그렇게 땀 흘려 세상을 바꾸기 위해 1등으로 나아가려는 이는 ‘이기적’이라며 비난한다.

더구나 그런 의견을 내는 이들은 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기득권도 아니고 일찌감치 경기를 뛸 필요조차 없이 앞서 나가버린 실력자들도 아니다. 그런 고만 고만한 이들이 ‘대의’를 위해 서로를 희생하라며 아우성친다.

‘권리’를 희생하는 것과 자기 스스로에게 정직했던 ‘땀’을 ‘대의’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무시하는―혹은 무시하기를 강요하고 당연시하는―건 다른 일이다. 땀 흘려 노력하는 걸, 그래서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무언가를 해내는 걸 칭송하면서, 동시에 그 땀을 무시한다면 그건 그저 자기모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처럼 ‘자기모순’에 빠져 살다 보니 ‘행복’할 수가 없다. 땀을 흘리고 그 땀을 통해 주어진 사회 체계 안에서 무언가를 획득하기 위해 살든지, 아니면 그러한 사회 체계를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 자유롭게 살든지, 어느 쪽이든 일관성을 갖고 살아야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흘린 땀을 대의를 위해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건 집단 린치지 결코 자발적 희생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차라리 안톤 오노가 행복해 보인다. 그는 적어도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에 충실했고 그걸 통해 이룬 대가에 솔직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 우리는 ‘행복’한가? 아니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정말로?

▲ 김진혁 EBS PD

1000미터에서도 금메달을 딴 이정수 선수는 ‘호석이 형이 앞으로 치고 나와 다른 이들의 체력을 많이 소진 시켰다’며 이호석 선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호석 선수는 결코 양보한 것이 아니라지만 은메달을 건 그의 표정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나 보였다. 그런 이호석 선수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의 룰을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던 학생들 중에 ‘모두’가 아니라 ‘일부’만 천하대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왔을 때, 과연 시청자는 어떤 선택을 할까? 혹시 또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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