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 군대를 이끌었던 그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특히 그가 최초의 동서양 전쟁으로 불리는 ‘탈라스 전투’의 총사령관이었고, 결과적으로 종이 전파 등 동서 문명 교류에 역할을 했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난 3일~5일 3부작으로 방송된 KBS <고선지 루트>(연출 장영주, 송영석)는 대중에겐 다소 ‘생소한’ 고선지 장군을 주목했다. 9년 전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장영주 PD가 다시 한 번 그를 대중 앞에 불러왔다.
두 번씩이나 고선지를 다룬 이유에 대해 장 PD는 “한국과 관련된 인물 중 세계사와 직접 맥이 닿아 있는 사람은 고선지가 거의 유일하다”면서 “고선지는 중국사에서도, 세계사에서도 주목받는 장군”이라고 말했다.
9년 전 고선지를 소개하는 데 주력했던 장 PD는 이번엔 1200여 년 전 고선지가 갔던 원정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방법을 택했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드넓은 원정길이다.
10개월 동안 제작을 마쳐야 했기에 시간에 쫓기는 일정이 계속됐다. 장 PD는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으면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장 PD는 “고선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직접 현장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외국 학자들의 논문에서 고선지를 나폴레옹이나 한니발과 같은 명장으로 평가하는데 그것을 확인하는 데 가장 필요한 방법은 현장에 직접 가보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고선지의 서역 원정로 1만 km가 화면에 담겼다.
탈라스 전투를 비롯해 고선지가 행했던 대규모 전투들도 재연됐다. 이제는 역사책 속에만 존재하는, 그것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 중국 배우를 출연시켜 고선지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고선지를 어떻게 쉽게 알리고, 이야기하느냐가 프로그램의 성패를 좌우할 것 같다”는 생각에 “시청자들의 상상을 오히려 제한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선택한 방법이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비교적 쉽게 고선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발전기금 지원을 받아 제작된 <고선지 루트>는 부족한 제작비를 KBS의 지원으로 충당하려 했다. 그러나 긴축 재정을 실시하던 이병순 전 사장 당시여서 이는 쉽지 않았다. 결국 생생한 전쟁 장면은 일부 포기했고, 4부작으로 기획했던 방송도 3부작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코 만만치 않았던 촬영과 부족한 제작비 등을 이겨내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고선지 루트>. 그런 <고선지 루트> 방송을 통해 장 PD가 바라는 바는 소박했다. “시청자들이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당나라로 끌려갔던 사람 중에 고선지 같은 사람이 있었구나, 그 사람이 세계사에 큼지막한 터닝 포인트와 접목돼 있구나, 그 정도만 알았으면 한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고선지 루트>가 너무 아쉬워서 다시 정말 괜찮은 프로그램을 하나 더 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조선 판 사랑과 영혼-400년 전의 편지>, <풍납토성 지하 4미터의 비밀> 등 지난 12 년 동안 역사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해온 장 PD는 다음에도 역시 “역사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