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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최선영 독립PD

지난주부터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읽고 있다. 난해한 글쓰기로 인해 쉽게 읽혀지지 않지만, 전화에 대한 글은 충격적이다.

‘전화가 미친 사회적 영향 중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은 홍등가가 사라지고 콜걸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콜걸은 뚜쟁이와 포주 없이도 자신의 일을 해낼 수 있다. 즉, 전화는 집필과 출판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타자기 같은 것이다.’

그는 전화라는 기술에 의해 장소성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의 감각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음을 미처 생각지 못한 지점에서 읽어내고 있다.

내가 겪은 방송의 기술적 변화만 보더라도 그렇다. ‘ENG 세대’로 조연출을 시작한 1994년, 아날로그 베타 카메라로 촬영해 1:1 편집을 해서 폭이 ‘완(one)인치’인 테이프에 프로그램 완성본을 담았다. 1996년 Digi-beta 카메라로 야외촬영 할 때까지도 카메라, 조명, 조연출까지 최소 6명의 스태프가 다인승 차량으로 촬영 다녔다. 그러다 1997년 6mm DV 테이프를 사용하는 Sony VX-1000 하나 들고 리포터와 둘이 첫 해외촬영을 나갔다. 촬영감독과 실랑이 하는 일 없어 편했고, 조명설치 하느라 시간 뺏기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내 마음대로 찍을 수 있어 기동성 면에서는 최고였다. 사실 그 당시 장난감 홈비디오 카메라 같았던 ‘6mm 카메라’가 그렇게 빨리 보급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카메라가 방송 현장에 가져온 변화와 영향은 무엇인가. 우선 내가 해외출장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여자 PD는 해외출장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던 때였는데 여자 리포터와 함께 두 명의 여자가 방 하나를 쓰는 효율적 조합 때문이었는데 환율이 최고였던 IMF 때 해외촬영이 많았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경제위기 극복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저렴한 해외기획물 덕분이었다.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IMF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6mm 카메라’가 이렇게 빨리 확산 되었을까. 방송 제작 현장도 예외 없이 구조조정이 요구되었던 이 시기, 때마침 등장한 ‘6mm 카메라’는 디졸브 과정을 생략하고 단칼에 나의 카메라와 조명 스태프를 현장에서 해고시킨다. 전 세계적 대세로 인한 6mm 카메라 사용은 제작비를 반 토막으로 줄여주면서 일방적으로 ‘이제부터 이 기계만을 사용한다’는 묵시적 합의를 도출해 냈는데 이때가 방송생태계 파괴의 시초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어느덧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고는 나도 생존하기 어려운 구조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었던 6mm카메라가 이제 방송생태계에 부메랑효과로 돌아온 것은 아닌가. 얼마 전 만난 여자 후배 PD는 지하철을 타고 촬영을 다닌다고 했다. 가벼웠던 6mm 카메라는 점점 더 무거워졌고, 와이드 렌즈, 마이크 수신기, 삼각대를 혼자 들고 다니며 세팅해야 하니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힘들단 소리는 못한다고 했다. 아니 ‘6mm 카메라’는 남녀 PD 불문하고 연출자는 VJ라는 이름으로 촬영자도 연출자도 저널리스트도 아닌 어정쩡한 포지션이 되면서, 적은 제작비로 빨리 잘 찍고 편집하는 능력자들을 더 많이 양산해냈다.

▲ 최선영 독립PD
이 능력자들로 인해 10여 년 만에 우리나라 많은 방송현장에선 ‘6mm 카메라’를 쓴다. 새로운 기술 덕분이 아닌 그것을 받아들인 능력자들 덕분이다. 교양, 오락, 예능 등 6mm 카메라 없이 제작할 수 없는 구조로 바뀌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제작비, 유통구조, 인력구조 등 전반적인 시스템이 이 능력자들에 의존해 있는 형국이다. 자본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의 확산이라는 학습을 이미 6mm 카메라를 통해 배웠다. 이런 방송 구조가 몹시 허약하게 느껴진다. 이 구조는 또 다른 새로운 기술에 의해 무너질지 모른다. 기술은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그 무엇이다. 아무런 예고 없이 놀라운 속도로 노동의 형태를 바꿀 미디어나 새로운 기술이 오기 전 방송생태계의 원칙이 바로 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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