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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의 언니가 간다]

원래도 한국은 낙태 금지국가였지만, 요즘 정부 시책 덕분에 낙태를 하려면 어마어마한 돈을 내거나 원정낙태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심지어 낙태 수술을 해 주는 병원을 고발하는 ‘낙파라치’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물론 계획된 임신이 가장 행복하고 어쩌다 한 섹스로 뜻하지 않게 중절수술을 해야 한다면 모체나 태아에게 모두 비극이겠지만, 여성의 몸을 스스로 어쩔 수 없다는 현실도 비극이다.

하지만 현 정부 방침 앞에서 이런 소리는 배부른 소리를 넘어 돌 맞을 소리다. 아니, 나라를 위해 배 부를 각오가 안 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결혼 안하고, 혹은 못하고 그리고 애 안 낳은, 혹은 안 낳을 여자는 매국노 취급까지 각오해야 할 판이다.

비혼모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나 뭐 그런 것 전혀 없이 무조건 뱃속에서 10개월 키워서 어쩔 수 없이 낳게 만들어 출생률을 높이자는 단순 무식한 지금의 방책은 이를테면 낳아 놓으면 낳은 네가 애를 갖다 버리겠냐 어쩌겠냐, 뭐 이런 식으로 출산과 양육 문제를 개인의 어깨에 죄다 짊어지게 하는 것인데, 내 자궁을 어쩔지 말지 자궁도 안 달린 사람들이 거의 결정해 버린다는 것도 불만이지만 가임기에 애 안 낳은 여자는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어깨 움츠려야 하는 것도 불편하다. 마치 내 자궁이 공공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다.

▲ 중앙일보 2월25일자 C7면
실제로 그들은 공공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시책을 밀어붙이는 것이겠지만, 전 세계의 인구 폭발과 내 나라의 출산률 저하를 동시에 근심할 수 있는 이들의 뇌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 것일까. 지구가 지금 고통 받고 있는 것은 지나치게 많은 인간들이 북적거리는 탓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니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근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입 밖으로 내놓고 말은 못해도 내심 중국이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애 낳지 말고 우리는 낳았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No kid : 아이 없이 살아야 할 40가지 이유>의 저자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코린느 마이어는 ‘이미 포화상태인 북미나 유럽에서 애를 낳는 것은 죄악이다’라고까지 쏘아붙이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임기에 아이 낳지 않는 여자를 비애국자, 혹은 매국노로 매도하는 분위기는 부당하다.

여자고 남자고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을 매도하는 가장 흔한 표현은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인데, 달리 생각해 보면 아이 낳지 않는 사람들은 조국이냐 지구냐의 양 갈래 길에서 지구를 택한 사람들이다. 조국의 출산율 저하도 문제고 지구의 인구 폭발도 문제지만 조국을 택할 것이냐 전 지구를 택할 것이냐의 기로에서 지구 편을 든 것이다. 그들은 아이 낳은 사람들이 온실 가스를 내뿜고 환경을 오염시킬 인간을 이미 충분한 60억 인구에 한 사람 더 추가했다고 해서 그들을 욕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만들어낸 아이를 귀엽다고 입에 발린 소리도 해 주고 선물도 사주고 돌잔치를 하면 돈도 낸다.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아이 못 낳아 본 사람은 아직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삶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값싼 동정이나 저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는 비난인 것이다.

▲ 김현진 에세이스트

아이를 낳아 봐야 진짜 어른이 되고 철이 든다는 둥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 없다는 둥 언제까지 그런 소리 말고, 트루먼 카포티가 말했듯 우리는 같은 집에서 각각 다른 문으로 나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조국, 혹은 지구로. 애 낳지 않은 나는 애 낳은 당신이 지구 대신 조국 쪽 문으로 나갔다고 욕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 자궁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하게 놔 두기를. 우리는 다 한국인이자 지구인이고 무엇이 더 큰 개념인지는 초등학생도 알 테니 개인이 택하면 된다. 한국인으로 살 것인가, 지구인으로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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