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일상화, 무감각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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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일상화, 무감각한 사회
[프로그램 리뷰] SBS 드라마 <자이언트>
  • 정철운 기자
  • 승인 2010.06.08 2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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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자이언트> ⓒSBS

“살면서 죄 한번 안 짓고 사는 놈들 있겠습니까.” 황회장(이덕화 역)은 말했다. 그의 말처럼 70년대 한국사회는 ‘죄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유신독재정권 아래 학교, 기업, 중앙정보부 할 것 없이 어디서든 약육강식의 폭력적 서열관계가 지속했다. 경쟁에서 뒤쳐진 자들은 압제에 숨죽이거나, 옆 사람을 밟고 강자의 위치로 올라섰다.

70년대 서울, ‘강남 재개발’은 약육강식의 공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이강모(이범수 역)는 여느 주인공처럼 ‘지혜와 용기로 승리하는 인물’이지만 정의를 대변하지 않는다. 과거 드라마 <인간시장>의 ‘장총찬’이 정의를 위해 사회악을 응징한다면, <자이언트>의 이강모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적’을 응징할 뿐이다. 강모는 장총찬 보다는 <하얀거탑>(2007)의 장준혁(김명민 역)과 어울린다.

강모는 지난 7일 방송분에서 정연(박진희 역)에게 말한다. “너, 배고파서 굶어본 적 있어? 너무 억울해서 피눈물 흘려본 적 있어? 억울한 게 싫으면 성공하면 돼.”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강모의 모습이 솔직해 보인다”고 말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개발주의의 피해자로, 어쩔 수 없이 체제에 편입된 자들이다. 이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그들과 똑같이 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강모는 현실에 있을법한 캐릭터다.

▲ SBS <자이언트> 이강모(이범수 역). ⓒSBS
<자이언트>는 강모와 함께 70년대 한국사회의 ‘악의 일상화’를 보여준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인간성이 있으나 사회적 관계에서는 모두 부정과 담합의 이해관계로 이어져 있다. 8일 방송분에서 강모가 하도급 업체의 담합을 깨려고 자재를 팔아먹은 비밀장부를 ‘폭력적’으로 찾아내는 것이 상징적인 예다. 강모는 ‘누구나 약점은 있다’는 대한민국 사회의 ‘진리’를 이용해 남들처럼 약점을 잡거나 감추는 방식으로 성공에 다가선다.

드라마는 주인공을 통해 일상화 된 악을 보여주고, 악에 무감각해진 사회를 ‘덤덤하게’ 고발한다. 그리고 욕망의 정점에 ‘재개발’을 올려놓는다. 사람들은 욕망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타인에게 버려진다. 극중 ‘지하철 공사 입찰권’을 둘러싼 대륙건설과 만보건설의 싸움은 ‘중앙정보부와 건설회사’간 커넥션 관계를 보여주는데, 이는 흡사 2010년의 ‘검사와 스폰서’ 예고편을 보는 느낌이다. 70년대의 욕망과 약육강식은 불행히도 지금 우리 옆에 남아있다.

“강남 땅값은 왜 그렇게 오르는겨. 니 아부지가 노름판에 말죽거리 땅문서만 안 팔았어도….” 극중 서민의 푸념은 ‘자본’이라는 거대한 ‘자이언트’ 앞에서 무기력한 자들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강모처럼 스스로 악의 일상에 뛰어들 것이다. 하지만 강모가 바라는 성공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다. 넓게 보면 그는 체제에서 탈출하기 위해 정상에 서고자 한다.

강명석 평론가는 “처음엔 강남개발이라고 해서 친(親)MB드라마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지만 보다보니 반(反)MB드라마 같다”고 말했다. 서러운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강남은 애증의 대상이다. 오늘도 땅값에 일희일비하며 주택담보대출 이자에 허덕이는 우리는 어떤 ‘성공’을 바라는 걸까. 지난 7일 방송에서 건설현장 인부는 강모에게 말한다. “도둑놈들이 지은 집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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