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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의 언니가 간다]

한나라당 김무성이라는 사람이 지난 지방 선거 전 “아새끼들 투표 제대로 하게 가르쳐야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2004년 정동영의 ‘노인네’발언은 경로우대증을 가지고 있는 모든 노인 세력을 총궐기시켰지만 우리 ‘아새끼’들은 그다지 화가 나지 않는다. 어른들의 근심대로 애들이 스펙 쌓기에만, 제 눈 앞의 돈벌이에만, 그저 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해서 그런 것들도 있겠지만 한나라당의 가장 큰 힘, ‘그러려니’ 덕분이다. ‘그러려니’, 이것이야말로 한나라당이 지난 몇 년간 한나라당으로 상징되는 수구 보수 꼴통 세력이 획득한 가장 큰 권력이며 자본이다. 한국 사회에서 무슨 짓도 할 수 있는 VIP 프리 패스다.

▲ 경향신문 6월4일자 1면.
언뜻 그러려니 지들이 그렇지 뭐, 하는 이야기는 그들을 무시하는 것 같고 업신여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굉장한 것이다. 뭐든 마음대로 막무가내로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사회 자유 이용권, 입에서 나오고 싶은 대로 지껄여도 되는 자유 발언권, 어차피 말도 안 통하는데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백지 위임장이다. 이를테면 이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가는 식이다. 누가 이번 선거에 아새끼들 투표 제대로 하게 하라 그랬대. 누가? 아 한나라당 누가. 아 그래? 누가 자꾸 어뢰 1번이래. 아니 도대체 누가? 아 한나라당에서. 아 그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끝난다. 더 나아가 뭐 그런 것 같고 촌스럽게 다 알면서 왜 이래, 걔들이 그런 줄 이제 알았어? 야 걔들이 그럼 말 같은 말을 할 줄 알았냐 다 그러려니 하는 거지, 너 몰랐어?

그러려니, 하고 말할 때 언뜻 우리가 그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정말로 무시당하고 있는 건 우리 쪽이라는 걸 생각하면 한없이 허탈하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아깝게 패배한 후 한명숙을 지지한 이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노회찬에게 투표한 3퍼센트에게 화냈다. 너희들이 그 3퍼센트 가지고 사표 안 만들었으면 이겼다는 것이다.

왜 저쪽에 대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알량하고 힘도 없는 3%를 족치는가. 그 3%라고 해 봤자 사실 서울 사는 진보신당 당원과 그 가족을 탈탈 턴 정도의 몇 명일 테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쪽은 만만하다. 어차피 저쪽에는 화내 봤자 먹히지도 않는다. 이쪽에 화내는 게 속 편한데다 뒤탈도 없다. 그러니 야 쟤들은 말해도 먹히지도 않는 애들이고 늬들은 그래도 말귀 알아먹을 만한 애들이 왜 그러니, 하고 버럭 화내는데 그 속상함과 분노와 답답한 마음을 모를 바는 아니나 언제까지 저들에게 ‘그러려니’의 면죄부를 허용해선 안 된다 싶다.

애초에 그러려니, 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이미 지고 들어간다. 야 걔들이 말이 통할 애들이야? 말해도 안 먹히는데 말하면 뭐해? 하고 우리가 그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할 수밖에 없을 때 그 포기, 혹은 방임 속에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자유를 획득하고 있는가. 아무도 기대하지 않고 하도 말이 안 통하니 귀찮아서 싸우려 하지도 않고 대화가 될 거라 기대하지도 않는 점, 이것이야말로 이 정권의 가장 강한 점이다. 촛불집회? 시끄러워 안 들려, 내가 1번이라면 1번인 거야 안 들려, 4대강 내가 하겠다면 하는 거지 시끄러워…응? 뭐라구? 안 들려 안 들려, 내 귓구멍에는 접수 안 되니 포기해 포기… 그래서 우리는 아예 같은 한국어라도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는 그들을 죄다 ‘버리고’, 그나마 말 통하는 사람들끼리 박 터지게 싸운다. 저쪽이 도무지 들어 주지 않으니 말이 먹히지 않는 그 울분까지 서로 풀며 물고 뜯는다.

▲ 김현진 에세이스트

야 너 말이 통할 사람이 왜 그래…너야말로 말 좀 통할 줄 알았는데 배신이다 그러지 말고, 그 ‘그러려니’를 도로 뺏어 오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말고 상식에 벗어난 말과 일에 매번 처음 본 듯이 깜짝 놀라자. 지쳐도 매번 화들짝 소스라치자. 그러려니 라고 한 번 말할 때마다 자유이용권을 한 장 끊어 준다는 것을 잊지 말고 툭하면 놀라고 이럴 수 있냐고 따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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