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노동은 영혼을 잠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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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노동은 영혼을 잠식한다
[김현진의 언니가 간다]
  • 김현진 에세이스트
  • 승인 2010.07.14 13: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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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풀칠이나 하겠다고 아르바이트를 몇 개 하면서 사람들이 왜 그토록 불안정노동을 기피하는지, 불안정노동이 끝도 없이 불안정한지 요만큼이나마 알았다. 지금의 나는 한 마디로 여성 비숙련 노동자다. 우리나라에서 글만 팔아서 생계 유지가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절대 거기에 해당되지 못한다. 빈둥거리고 살 수 있을 만한 형편도 못 되니 뭐라도 해야 하니 일한다.

그러다가 국세청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소득이 별로 없는 가구를 지원하기 위한 지원금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홍보물을 보고 희망에 차서 신청하러 갔더니 얼굴을 보자마자 미혼 여성은 해당이 안 된단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든 말든 미혼 여성 노동자는 제대로 된 노동자로 인정이 안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육체 노동 겸 감정 노동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녹즙을 배달하고, 점심때가 되면 카페에 가서 커피를 나른다. 벌써 다섯 달째다. 부양가족이 없다면 그럭저럭 먹고 살 만 했을지도 모른다. 미혼인 주제에 혜택은 없고 부양가족만 있다. 카페에서 같이 일하는 스물 세 살짜리 아가씨도 그런 처지다. 이 아가씨는 하루 열다섯 시간씩 이 가게에서 일한다. 다섯 시 반이면 커피 머신을 끄고 호프집으로 변신한다.

이 일이라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른 넘은 여자는 안 받아주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저녁에 주방을 맡고 있는 ‘주방 사장님’이 출근한다. 오너만 그녀를 이모라고 부를 수 있고, 우리는 모두 사장님, 이라고 불러야 한다. 한 번은 고종석 씨가 여러 사람 이끌고 오셨다가 청할 일이 있어 그녀를 주방장님, 이라고 불렀다가 다음날 내가 된통 당했다.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주방장이라고까지 불려야 되냐는 것이다. 그분은 프랑스에 오래 계신 분이라 그랑 셰프라고 하면 굉장한 존칭이에요, 하고 좋게 말했더니 그럼 그랑 셰프라고 부르지 왜 주방장이라고 부르냐고 계속 분을 낸다.

그랑 셰프와 주방장이 뭐 그리 격이 다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남의 밑에 일하는 종년이냐, 과장님한테도 차장님이라고 불러 주면 기분이 좋은 거 아니냐고 좀처럼 그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나는 과장님은 과장님이라고 불러야 되고 차장님은 차장님이라고 불러야 되는 것 같지만 그냥 말없이 듣고 있다.

그녀는 지난번 지방 선거 때 오세훈을 찍으라고 강권했다. 그러면서 미스 김은 누구를 찍을 거냐고 해서 어정쩡하게 말을 돌렸더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주관이 없다며 혀를 찼었다. 그 때는 내가 아줌마 생각을 해서 주관을 안 밝히는 깊은 뜻을 몰라주다니, 싶어 어이만 없었는데 주방장이라는 소리 한 마디에 한 시간 가까이 도마 앞에 서서 식칼을 쾅쾅 내리치며 분통을 터뜨리는 걸 보니 어이가 없다 못해 서글펐다.

누군가는 커피를 내려야 하고 누군가는 그 잔을 내가기도 해야 하고, 누군가는 맥주를 따라야 하고 안주를 만들기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일에 다들 이렇게 진저리를 낸다. 같이 일하는 사람끼리도 이렇게 서로 무시한다. 될 수 있는 한 이 일에서 빨리 발을 빼고 싶고, 나는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지금 하고 있는 것뿐이고 그렇지만 나와 같이 일하는 저 애는 이런 일이나 할 사람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김현진 에세이스트

그러므로 마구 구박해도 되는 것이다. 그녀가 되고 싶어 마지않는 그 사람들이 그녀에게 발톱의 때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녀의 빽빽대는 모습이 더 슬퍼졌다. 불안정노동의 늪은 너무 깊다. 다들 과장으로 차장으로 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변해야 할 것 같은데, 비정규직의 고단함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안정적인 거라곤 이게 불안정할 거라는 사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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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태 2010-07-15 22:16:24
사람이살아가면서 얼많큼만족하며 살수있나요 님께서느끼는감정개인으로써는소중한데요
저도강남에서 이름만대면알수있는 가게운영하는데요 당신같은에세이스트가 간절합니다
테스트한번 보실래요 강남역앞 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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