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이 정치를 탈정치화시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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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정치를 탈정치화시킨다면
[글로벌] 독일=서명준 통신원
  • 독일=서명준 통신원
  • 승인 2010.07.20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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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독일의 공영방송 ARD는 한 민영채널의 인기 MC를 영입하려던 오랜 소망을 이루었다. 평소 이성적인 이미지로 정평이 난 독일 공영방송답지 않게, 올해 60주년 개국을 기념해 하늘로부터 선물이라도 받은 듯 들뜬 분위기다.

최대 민영채널 RTL의 퀴즈 프로그램 <누가 백만장자일까>로 일약 스타 MC가 된 귄터 야우흐가 그 주인공인데, 황금시간대 공영방송의 정치토크쇼 진행자로 기용하려는 오래된 소망이 드디어 해소됐다는 방송사측의 공식발표는 정말 기쁨으로 충만하다.

▲ 독일 ARD가 스타 MC 귄터 야우흐를 일요일 황금시간대 정치토크쇼 진행자로 영입하면서 간판 정치토크쇼였던 <안네 빌>의 방송시간은 목요일로 밀려났다. ⓒARD
야우흐는 올 가을 개편부터 ARD의 일요일 황금시간대 정치토크쇼의 진행을 맡는다. 더구나 자신의 제작사인 아앤유(I&U)가 프로그램을 외주 제작하는 조건이니 야우흐로서는 대박인 셈이다.

ARD의 구애가 시작된 것은 인기 여성MC인 자비네 크리스티안젠의 후임자를 물색하던 지난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ARD와 야우흐의 물밑 접촉 소식이 물 새듯 새나가면서 ARD 방송평의회의 극렬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결국 ARD가 또 다른 탁월한 여성 MC인 안네 빌을 영입하는 쪽으로 기울자 야우흐는 공개적으로 ARD를 비아냥대기에 이른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잠수함을 타고 더 깊은 물밑에서 공들여 작업 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니 최근 잘 나가는 정치토크쇼 <안네 빌>을 밀어낸다는 충격적인 소식의 충격도가 다소 덜한 편이다. 안네 빌은 그에게 자리를 내주고 뜬금없이 목요일 밤으로 밀리고 말았다. 주요 초대 손님들인 장·차관급 인사들, 정치인들은 늦은 밤에 방송국을 찾아야 할 판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나팔을 불렀던 크리스티안젠과 달리, 사회문제를 날카롭게 제시할 뿐만 아니라 시청률도 잘나오는 포맷인 <안네 빌>이 이렇게 된 이유는 더 나은 포맷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민영채널 인기 MC의 이름값에 밀렸기 때문이다. 더 높은 시청률과 야우흐의 안정적인 중간층 이미지 때문이다.

▲ 독일=서명준 통신원/독일 베를린자유대 언론학 박사
퀴즈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똑똑하고 편하면서도 조소와 야유가 적절하게 배합된 캐릭터로 인기를 얻은 야우흐는 경제적으로 다소 안정된 중산층 교양시민들이 스포츠든 경제위기든 어떤 문제든 물어보고 싶은 ‘중산층의 MC’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말은 마치 중견 정치인의 말과 같은 비중을 가질 정도이다. 그는 예컨대 메르켈 연방총리와 동급으로 인식되면서 보수 부르주아계급의 옴부즈맨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귄터 야우흐는 TV 정치 프로그램의 탈정치화를 확실히 보여주는 상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시사 프로그램은 궁금한 것을 간단히 묻고 답하는 퀴즈시간이 아니라 사상과 의견이 충돌하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해보는 ‘논쟁터’이다. 그런데도 공영방송이 정치의 탈정치화에 앞장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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