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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우리가 사는 동안 알아야 할 것

“나이 많다고 젊은이보다 더 나은 선생이 될 수 없고 어쩌면 그보다 못할 수도 있다. 나이 먹는 과정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에서 날카롭게 지적했을 때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90을 넘긴 지센린 선생은 〈다 지나간다〉에서 좀 더 과격한 표현을 쓴다.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별로 해 줄 얘기가 없는 것은 대부분 인생을 헛살았기 때문이다.” 50 갓 넘은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후배에게 무슨 얘기를 해 주기보다는 “너나 잘하세요” 스스로 타이르는 게 낫지 싶다.

〈김혜수의 W〉를 함께 하는 승준이는 내게 정말 깍듯이 선배 대접을 해 준다. 동료 PD로서 함께 의논하며 일하는 것으로 족한데, 승준이는 굳이 선배에게 배워야 한다며 시시콜콜 의견을 구하고, 편집과 연출 시범을 보여달라 한다. 후배에게 마땅히 줄 만한 게 없다는 부끄러움이 앞서서 “그냥 알아서 하면 되지” 손사래를 친다. 승준이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꼭 필요하다”고 우긴다. 그의 패기에 한 풀 죽어서 짐짓 공감을 표한다. “사실 PD 사이에 ‘온고’(溫故)가 잘 안 되는 건 문제지. NLE 편집도 못 하는 구닥다리는 ‘지신’(知新)이 잘 안 되니 이 또한 문제”라고 자백한다.

이미 어엿한 중견 PD인 승준이가 새삼 배우겠다고 덤비는 것은 그가 뭘 잘 몰라서가 아니라, 최상의 PD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자세를 모든 PD들이 나눠 가지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선후배 PD들 사이에 경험과 지식 전수가 잘 안 되는 징조는 여러 군데서 보인다. 정보 공유, 소통 활성화를 위한 논의는 언제나 있었고, 언제나 개선되어 왔지만, 또한 언제나 부족했다. 그만큼 소통과 공유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배들에게서 배울 게 없다고 얘기하는 후배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것을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고, 후배들의 앞날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울해진다. 그보다는, 같은 경험이라도 다른 사람이 겪으면 새로운 경험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 개인, 한 PD의 삶 자체가 하나의 우주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경우든 좀 더 나눠주려는 선배의 노력, 좀 더 배우려는 후배의 노력은 중요하고, 한 걸음 나아가, 배우는 데 선후배가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승준이가 ‘온고지신’을 얘기했는데도 내 생각은 잘 늙는 법을 고민하며 제자리를 맴돈다. “와인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 / 우리가 늙어서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리는 이것 뿐”(예이츠, 술노래)이란 시 구절이 무슨 뜻인지 이제는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냥 흐르게 내버려두라는 거다. 햇살이 적당히 비추면 꽃이 피어나고 진다. 꽃들은 잘난 체도, 불평도 없이 조용히 피었다 진다. 죽은 나무에서는 이끼가 자라고, 버섯이 피어나고, 곤충이 기어다니고,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튼다. 나무는 아낌없이 다 주고 조용히 죽어간다. 흙이 된 나무와 이끼와 버섯과 곤충과 새들은 다시 섞여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도모한다. 여기에 인간의 뼈와 살도 섞일 것이다.

▲ 이채훈 MBC〈김혜수의 W〉PD
나무처럼 죽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일단 살아 있는 동안은 일을 해야지, 생각한다. 후배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다 주어야지, 그리고 승준이에게 NLE 편집 배워야지, 생각한다. 배우는 동안 성장하는 거고, 그렇게 살다보면 헛늙었다 소리는 안 들을지도 몰라, 생각해 본다. 승준이가 ‘온고지신’ 얘기하며 내게 가르쳐 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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