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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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무엇인가?
[PD의 눈] 김진혁 EBS PD
  • 김진혁 EBS PD
  • 승인 2010.09.0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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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이 엄청나게 팔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그걸 정말 몰라서 그래?’였고, 그 다음으로 드는 생각이 ‘오죽 했으면 그 책을 다 사 보려 할까…’였다. 물론 그 책에 담겨 있는 정의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고찰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 서적을 그처럼 많이 구입하는 이유가 단지 ‘정의’에 대한 철학적 답을 얻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왜일까? 역설적이지만 그건 사람들이 ‘정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의라고 하는 건 굳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을 만큼 너무나 간단하고 당연한 것인데, 그와 같은 정의가 현실에서는 간단하지도 당연하지도 않는 것으로 취급되어지고 있으니 사람들은 도대체 자기가 당연하다고 믿는 그 정의가 정말 그 정의가 맞는지 헷갈리는 것이고, 그렇게 답답하던 차에 마침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턱 하니 눈에 띈 것이다!

이 때 재빨리 그 책을 향해 손을 뻗는 사람의 심리는 두 가지. 우선은 자신이 확신하는 그 정의에 대해 ‘맞아, 니가 생각하는 게 정의야!’ ‘세상이 정말 이상한 거야!’라고 이야기를 해 줬으면 하는 심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차라리 ‘아냐, 원래 정의는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어’ ‘힘 있고 센 것이 곧 정의인 것이야, 역사적으로도 그렇다구!’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심리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첫 번째 심리보다는 두 번째 심리가 더 강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언가 ‘논리’를 필요로 할 땐 강한 확신이 있을 때가 아니라 그 확신이 약해지고 흔들리며 포기하고 싶을 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대답하기 이전에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에 대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엔 몇 백 페이지의 지면 같은 건 필요가 없다. 그러한 행위는 그저 정의라는 가치가 극도로 훼손되어지고 그래서 사람들이 가치의 전도를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언론이 앞 다투어 책의 저자를 불러다가 인터뷰를 하고 인문학 서적의 놀라운 판매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지면 이곳저곳을 장식하는 와중에 사람들은 ‘정의’에 대한 확신을 상실해 간다.

▲ 김진혁 EBS PD

그러니 나는 저 책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는 걸 볼 때마다 뭔가 서늘한 기분이 든다. 뭐랄까, 팀 버튼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 떠오른 달까?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점점 커지고 급기야는 하늘의 태양마저 가릴 만큼 커져서 온 세상이 어두워지는 그런 장면 말이다. 그 아랜 삐쩍 마른 얼굴로 광대뼈까지 뒤덮은 다크써클을 늘어Em린 채 책이 만든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커다란 눈동자를 껌벅거리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제목을 응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건 분명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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