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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 아리랑국제방송 <고백> 박형실 PD

“고백”... ‘한일병합 100년’이라는 화두만으로, 방송하는 사람의 동물적인 부채감으로 무언가 만들어야 한다는, 만들고 싶다는 이끌림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다큐멘터리는 일찌감치 내레이션을 배제하기로 하였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이 과거 죽을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육성 앞에 감히 어떤 내레이션이 나설 수 있겠는가. 소위 인터뷰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솔직하지 않기로 이름난 일본인들, 게다가 매우 사적인 그것도 자신의 과거인생의 치부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이번 촬영의 관건이었다. 엄청난 소재 앞에 매우 소박한(?) 주제를 설정하게 된다. 이른바 ‘부메랑 법칙’이라 명명한 제작진의 슬로건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쁜 짓을 하면 꼭 그 결과(해악)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제작에 착수한 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구성. 단순한 스토리라인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일단 기본구도에서 상당히 고민한다. 밤을 뒤척이며 고민했던 지난한 과정이야 굳이 나열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공들여 껍질을 벗겨나간 수수께끼와도 같은 레이어 구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본은 가해자들의 육성이다. (이는 크게 ‘가해/피해의 틀’이 된다.) 둘째, ‘과거/현재의 틀’이다. (이는 자칫 과거가 ‘죽은 스토리텔링’으로만 끝날 것에 대한 우려에서였다).

▲ <고백> 촬영 장면. ⓒ박형실PD
다음은 작지만 핵심적인 장치들을 마련한다. 즉, 모든 출연자 (주요 증언자들로부터 거리인터뷰 대상에 이르기까지)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태어난 연도와 신분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장치이다. 출연자는 모두 -불행히도 나는 병합 이전 출생자를 만나지는 못했다. 참고로 최고령자가 1911년생이었다.- 한반도를 처참하게 뒤흔들게 되었던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출생자들이다. 제작자인 내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는(한국인, 일본인을 불문하고) 모두 역사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는, 겸허하게 고개 숙이라는 나름의 복선이었다고나 할까.

또 다른 장치는 모든 출연자들에게 ‘전쟁’의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참으로 다양한 -자신의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위치에 준한- 대답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본편 편집에서 주요장치로 등장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아쉬운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노병들의 ‘고백의식’이다. 나는 솔직히 이들을 가슴으로 편안하게 품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증언 자체를 쉽게 하지 못하게 하고 싶은... 어쩔 수 없이 뿌리 깊은 반일감정에서였을까? 그래서 이른바 재판과도 같은 ‘고백의식’ 장치를 두게 된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의 빈 방과, 빈 의자, 그리고 비장하게 마이크를 부착하는 그 일련의 과정이 모두 상징적 코드로 주제를 관통한다. (이는 결국 악착같이 나를 사로잡아, 프롤로그로 당당하게 살아남는 그림이 된다.)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만난 그들. 그들은 정말 달랐다. 그동안 보아온 일본인들과도 달랐고, 한국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갖고 있던 선입견의 경계선 안에서도 해석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피해자로서의 당당함(?)에만 익숙해있던 우리에게 가해자이면서도 초라해진 이들의 고백은 그 자체만으로도 울림이 있었다. 징병으로 끌려온 전라도 출신 병사를 아직도 자신의 애틋한 전우로 기억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병합이후 60년, 해방이 된 지 25년이 지나고, 한국전쟁이 끝난 지도 한참이 흐른 뒤 출생한 ‘나’라는 존재감이 너무나 초라해졌다고나 할까. 인생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을... 일본은 반드시 잔인해야만 했고, 일본사람들은 역사를 부정하고 평화를 가로막는 앞뒤 꽉 막힌 ‘스미마센 족(族)’이어야만 했는데 말이다.

그들 또한 역사의 타임라인 위에서 무기력한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을 깨달은 순간, 무언가 쿵 얻어맞은 듯한 느낌 그러면서 이게 한번으로 끝날 작업이 아니구나 하는 강한 구속감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 구석에서는 이들을 미화시키면 안 돼... 안 돼... 메아리가 울리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었다. 결국 그 순진무구한 일본군 사병은 최종 편집본에서 사라지는 운명이 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생체실험 군의관과, 퇴각 시 환자들을 안락사 시킨 간호사, 포로를 매달아 찌르는 훈련을 한 병사, 한국인 위안부들이 어땠는지를 증언한 할아버지 등이 된 것이다.

▲ 박형실 PD
다소곳이 손 모으고 앉아서 끔찍한 얘기를 해주던 그들. 아직도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남아 있다. 그들이 뿜어내던 어두운 에너지가 내 몸에 붙어 있는 한, 그리고 무섭도록 과거와 흡사하게 째깍거리는 역사가 있는 한, 그리고 방송인으로서의 나의 존재감에서 자유롭지 않는 한, 그들이 우리에게 주고자 했던 ‘피 묻은 진실의 고백’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인만큼 이 무서운 진리 앞에 오만해지기 힘든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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