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제일주의’가 굳건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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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제일주의’가 굳건한 이유
[김현진의 언니가 간다] 에세이스트
  • 김현진 에세이스트
  • 승인 2010.09.15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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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친구가 곧 아이를 낳는다. 그 친구가 사실은 말이야, 하고 말을 꺼냈다. 왜? 하고 물으니 알아보니 그 병원이 삼성 계열이라며 여기서 낳자니 메이드 인 삼성 같아서 기분이 좀 나빠, 하며 아예 딴 데서 낳아 버릴까? 하고 물었다. 농담이지만 진심이 반은 섞인 걸 친구도 알고 나도 알았다. 그러게, 애가 멍청하면 이상할 것 같고 똑똑해도 기분 나쁘겠다, 하면서 둘다 웃었지만 어쩔 수 없이 메이드 인 삼성 베이비가 태어날 것 같다.

▲ 경향신문 9월7일자 1면
친구 남편과 나는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의 집은 재개발 13구역이고 나는 12구역이라 친구가 결혼하기 전 우리는 그 동네에서 무던히도 모든 종류의 술을 마시고 무던히도 모든 종류의 일에 대해 갖은 험담을 했다. 몇 년 전 한화 김승연 회장이 아들 팬 놈 붙잡아다 반 죽여 놓을 때도, 촛불 시위 때 오물을 뒤집어 썼을 때도, 40년 된 순대국집이나 30년 된 치킨 집에서 끈질기게 술을 먹으며 나는 경사 높은 그 동네에서 끈질기게 살 각오가 있었는데 13구역 조합원끼리 분쟁이 일어났는지 어쨌는지 거기 살고 싶던 우리 집만 싹 헐리고 자기가 결혼해서 그 동네에 살 거라 꿈에도 생각지 않던 친구는 끝없이 올라가는 계단을 배를 잡고 조심스럽게 뒤뚱거리며 올라간다.

술을 퍼마시며 김승연 회장을 욕할 때까지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식 입장이었다. 어이구 그 아버지 멋지네, 우리 아버지였다면 나한테 못되게 군 놈들 다 야산에 파묻어 줬을 텐데 어쩌구, 이명박 대통령이 딸에게 건물 관리 명목으로 돈 만들어 준 거나 애들 죄다 위장 전입 시켰을 때도 늘 자식 입장이었다. 아이고 부러워 죽겠네 배아파라, 하고 우리는 맥주 잔을 부딪히며 아버지들을, 아저씨들을 비웃고 경멸했다.

그런데 다리 건너면 압구정인 동네에서 친구가 곧 몸을 풀게 생겼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에 이렇게 아이들이 많은데도 보습 학원 하나 없이 골목길에 방목된 아이들이 말이 너무 사납다며 벌써부터 자기 아이가 그 거친 말을 따라 배우지 않을까 친구는 어쩔 수 없이 염려하고, 비록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조촐하지만 주소를 어떻게 하면 바로 강 건너 남쪽에 있는 초등학교에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실낱 같은 희망을 품는다. 이런 게 위장전입이겠고, 나는 술을 퍼마시며 우리가 함께 놈들을 욕하던 때처럼 호기롭고도 정의롭게 친구에게 분노를 터뜨려 보일 수 없었다.

이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유명한' 아버지 겸 아저씨, 유명환의 입장에도 놓이게 된 것이다. ‘내 딸 최적화’ 시험을 만든 유명환은 좋은 아버지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그는 정말로 훌륭한 아버지다. 하지만 나쁜 아저씨에 나쁜 공직자에 나쁜 인간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는 그런 인간 천지다. 내 새끼, 내 가족에게만 훌륭한 사람이면 어디에도 나쁘게 굴어도 상관없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 특별히 꿀릴 것도 없다. 내 식솔에게만 훌륭하겠다는 나쁜 꼰대들의 연합은 자신들끼리 계속 훌륭한 짓을 하기 위해 지극히 단단하게 연대하고, 지금 사람들의 분노와 상처가 과연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순수한 분노인지, 그 연대에 끼지 못한 울분인지 잘 구분할 수 없다. 유명환이 내 아버지일 때 애틋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김현진 에세이스트

일단 지금 한국에서 가장 부족한 건 ‘자존심’이 아닐까. 고작 일자리로 부모 신세 지지 않겠다, 제가 밥벌이를 뭘해서 입에 풀칠하든 자식 일까지 내가 쩨쩨하게 손대지 않겠다, 뭐 그런 자존심이랄지 자립심이랄지, 하여튼 호연지기가 없는 것이다. 내 딸 최적화 시험을 만드는 부모도 자립하지 못했고 좋아라 그 시험 치는 자식도 자립 못 했다. 그리고 그걸 ‘능력’이라 착각한다. 친구 아기는 부디 자립했으면서 행복한 인간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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