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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박봉남 독립PD

그와 만난 것은 IMF한파가 한창이던 시절, 마포에 있는 한 독립제작사 작업실에서였다. 그는 참 행색이 남루했으며 잠잘 곳도 변변치 않아서 제작사 한 켠에서 밤을 새며 프로그램을 만들곤 했다. 물론 내 처지도 비슷했다. 세월이 흐르고 우리는 각자 여의도 바닥을 떠돌며 작업을 했고, 어느 때인가 다시 만났다. 가난했지만 우린 여전히 열정이 넘쳤고 프로그램 잘 만드는 것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우리는 일 년 넘게 한 사무실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는 천성이 그런지 사무실을 어질러놓는데 일가견이 있어서 나를 자주 고통스럽게 했다. 그때도 그는 같이 밥을 먹으면 한 번도 밥값을 내지 않았다. 여전히 가난했기 때문이다.

▲ 영화 '오래된 인력거'
그는 인도를 좋아했다. 인도에 관한 프로그램을 꽤 많이 만들어냈고 자칭타칭 인도 전문PD로 통했다. 경계를 넘나들고자 했음인지, 어느 해인가는 목숨을 걸고 인도 바하르주에 가서 1년 넘게 거주하며 인도의 계급전쟁을 다룬 다큐영화를 만들어오기도 했다. 지금도 웬만한 힌두어는 곧잘 하고 콜카타의 골목을 누비면 동네 부랑배들이 ‘형’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닐 정도니 그가 인도땅에 들인 품과 시간을 짐작할 수 있을게다. 그는 촬영장비에 대한 욕심도 많아서 푼돈만 모이며 홀라당 장비를 사는데 돈을 털어내고는 했으니 천상 그가 가난을 면할 길은 없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때부터인가 밥값을 내기 시작했다. 그 뿐인가 술을 먹으면 항상 술값을 냈고 2차에 가도 어느 순간 휙 나타나서 돈을 내고 사라지고는 했다. 그 비밀은 인도였다. 그는 아내, 아이와 함께 대구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데 그 곳에 자그마한 인도식당을 낸 것이다. 그렇게 그가 가난하던 한 시절의 문턱을 넘긴 했지만 쉽게 얻어낸 결과는 아니다. 도망친 인도인 주방장을 찾으러 전국을 뒤지기도 했고 지금도 시간만 있으면 직접 식당에서 요리를 하고 있으니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게다.

그는 독설가다. 가슴에 분노가 많아서 이를 삭이지 못하고 뱉어내고는 했는데 특히 방송사의 횡포와 불합리한 구조에 분노를 토해내곤 했다. 때론 성정이 급해서 공격적인 언사로 사람을 몰아치는 경우가 있어서 본의 아니게 적도 많다. 게다가 그는 블로그형 인간이다. 파워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매일 새로운 책을 읽고 새로운 장비를 테스트하고 이런저런 세상일에 대한 의견을 분주하게 올린다.

물론 글의 상당부분은 독설과 분노로 가득 차있다. ‘그냥 조용히 일만 하다가 죽읍시다’ 라는 내 삶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사실 나는 ‘연출자는 프로그램으로만 말한다’라는 것을 핑계로 세상사에 대한 이러저러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최근에 큰 신세를 진 적이 있다. 작년 이맘때 내가 암스테르담 영화제에서 <아이언 크로우즈>로 중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을 때 그는 본인의 블로그를 통해서 매일 그 소식을 외롭게 퍼날랐다. 그리고 나의 수상을 기뻐하며 펑펑 울기도 했었다.

▲ 박봉남 독립PD
그러던 그가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한편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를 세상에 냈다. <오래된 인력거(My barefoot friend>. 인도에서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그의 친구, 샬림이라는 인력거꾼의 이야기다. 이 영화가 올해 암스테르담다큐영화제(IDFA) 장편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장편부문으로는 한국 최초이며 그렇게 한 사람이 또 경계를 넘어섰다. 그의 이름은 독립PD 이성규다.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며 그의 작품이 국제무대에서 선전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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