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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국민의 방송’을 자처하는 방송사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미 섭외가 끝난 출연자를 간부의 일방적인 지시로 배제하려 했고 이것이 여의치 않자 결국 방송 취소가 결정된 것이다. 그 출연자는 주제에 걸맞은 전 정부의 해당 부처 장관이라는 섭외 근거가 있었고, 제작진은 다른 의견을 충분히 수용하도록 상대 출연자까지 섭외한 상태였다. 하지만 간부의 지시라는 이유 외에는 어떤 납득할 만한 근거도 없이 출연은 무산되었다. 이번 논란을 벌인 주인공은 지난 3월에도 담당PD의 제작권을 빼앗아 제작 자율성 침해 논란을 일으켰던 인사다. 이것이 바로 KBS 주변을 떠돌고 있는 ‘블랙리스트’가 실제로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블랙리스트는 ‘검열’과 ‘통제’의 다른 이름이다. 물론 방송의 형식과 내용, 특정 인사의 출연에 대해 제작진과 조직의 간부는 의견을 교환할 수도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보완을 위한 추가적인 지시를 내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당한 이유와 근거 없이 조직의 상층부에서 강압적인 지시가 내려오고 이것이 관철된다면 이를 우리는 조직의 블랙리스트라고 부르게 된다. 내용의 제한, 출연자의 제한, 시시때때로 이뤄지는 검열과 통제의 ‘블랙리스트’. 이를 놓고 유형이냐, 무형이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논쟁일 뿐이다.

그런데 KBS는 오히려 이 ‘블랙리스트’를 언급한 한 연예인을 고소했다. 4개월여에 걸친 경찰의 조사는 본질은 외면한 채 발언의 출처, 진실게임의 양상으로 변질되었다. 더구나 사과만 하면 당장이라도 고소를 취하할 수 있다는 KBS의 입장은 이 연예인을 겁박하여 발언을 취소시키고, 이로써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하는 꼴이다. 충분히 블랙리스트-검열과 통제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받을 행동들을 되풀이하면서도 KBS는 계속해서 ‘블랙리스트는 없다’만을 되뇌고 있다.

KBS는 이번 출연자 배제 논란을 단순한 의견 교환 과정의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 KBS가 블랙리스트가 없다고 인정받고 싶다면 이번 논란부터 제작진과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못한다면 이번 출연자 배제 논란은 KBS 사장을 비롯한 간부들에게 누군가를 위한, 무엇인가를 위한 블랙리스트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블랙리스트’ 논란은 다만 한 방송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블랙리스트라고 불리건, 검열이라고 불리건 최근 방송에 대한 유?무형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형식적 절차와 조직의 질서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검열과 통제는 방송의 주인인 시청자에게 제한적이고 편향된 정보와 재미를 강요하게 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제작 현장의 PD들에게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통제는 PD들 스스로에게 검열의 내면화, 블랙리스트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결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나칠 일이 아니다. PD 스스로의 각성과 검열에 대한 저항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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