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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운의 무한맵] ‘도망자’는 ‘대물’보다 현실적인 정치드라마

역시 곽정환-천성일 콤비였다. 초반의 액션 물량 공세와 어정쩡한 러브스토리는 ‘페이크’였다. KBS 2TV 20부작 드라마 <도망자>가 극의 중반에 접어들며 자본권력에 대항하는 ‘자본의 노예들’, 현대판 ‘추노’가 줄거리의 본래 의도였음을 드러냈다.

▲ '도망자' 10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사부와 이를 바라보는 지우의 모습. ⓒKBS 화면 캡처
이는 28일자 10회 방송분에서 잘 나타났다. 이날 방송은 <도망자>가 위트 있는 액션 코미디에서 사회성 짙은 정통 복수극으로 변하며 이야기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 것을 예고했다. 결정적 사건은 장사부(공형진 분)의 죽음이었다.

몸 안의 피가 응고되는 잔인한 죽음으로 퇴장한 장사부는 죽어가며 말했다. “너(지우) 때문에 죽는 거야, 나는…. 넌 나 개처럼 부려먹기만 하고…” 장사부의 죽음은 지우(정지훈 분)에게 지금까지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지우는 무엇이든 손익을 계산하고 상대방은 돈 버는 수단으로만 여기며 살아왔던 것.

그랬던 지우가 장사부의 죽음으로 ‘악의 근원’을 깨닫고 각성했다. 자신이 동경하고 따랐던 ‘돈’, 즉 기득권세력이 악이었음을 알게 된다. 지우는 언젠가 “우리 아버지가 좌편향은 무조건 안 된다고 했어요”라 할 만큼 기득권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기득권의 정점에 있는 ‘멜기덱’ 양회장에 의해 소중한 사람을 잃고 입장이 바뀐 것이다.

‘돈의 노예’였던 지우는 금괴와 조선은행권 화폐로 대표되는 제도권력의 상징 양회장에게 정면 대결을 선언했다. “너, 그리고 너희들, 내가 죽인다.” 제도권 밖에서 제도 진입을 노리던 탐정 지우가 <추노>의 대길(장혁 분)이처럼 제도 권력과의 전면전을 벌이게 되는 극적인 장면이다. 이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동경했던 제도권에 대한 배신감의 표현에 가깝다.

▲ '도망자'에서 지우가 양회장 세력에게 선전포고 하는 장면. ⓒKBS 화면 캡처
천 작가는 <도망자>에서 탐정이 제도권 밖 직업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반복한다. 나카무라 황(성동일 분)은 말했다. “세상이 이치대로 흘러가면 우리 같은 탐정은 해먹을 게 없어.” 탐정은 제도권 밖에서 제도권이 못하는 일을 대신 해결해주고 체제를 유지시킨다. 이 직업은 흡사 조선시대 ‘추노꾼’과 유사하다.

하지만 양반의 이해를 대변하던 추노꾼이 결국에는 도망노비와 ‘계급적 동질감’을 갖게 됐듯이, 탐정 또한 제도권 엘리트 대신 권력의 노예가 되어버린 피지배계층의 이해를 대변하게 된다는 게 드라마의 큰 줄기다. 지우의 친구 케빈(오지호 분)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 밝혀지고 금괴를 둘러싼 탐욕의 스토리가 전개될 경우 자본권력과의 싸움은 더욱 극적으로 흘러갈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오늘날 검찰, 경찰, CEO, 정치인으로 환생해 불평등과 부의 독점으로 대표되는 악을 상징하고 있다. 양 회장은 자본권력의 화신으로 금괴를 ‘독점’하기 위해 경쟁상대를 죽이고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자 공권력을 이용하고 아들을 대통령에 앉히려는 등 살아있는 권력의 표본을 보여준다.

심지어 양 회장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다 검찰의 수사종결소식을 듣고 벌떡 일어서는 깜짝 쇼도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그동안 검찰소환 때마다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던 누구누구를 떠올리게 했다. “연봉 3천 만 원이면 3천 만 원 짜리 인간, 연봉 1억이면 1억 원짜리 인간이야. 한 표씩 행사한다고 평등하다고 생각 하지 마.”(양 회장 대사) 시청자는 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점점 소외되는 한 인간의 입장에서 지우의 반격을 기대하게 된다.

이제 ‘도망자’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노비들이 도망을 멈추고 양반을 죽이듯이, 제도권을 노리던 이들 또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선택을 한다. 이 같은 ‘무모한 도전’은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마이너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가 생각해봄직한 것들이다. ‘도망자’가 옆 동네 드라마 <대물>의 ‘오글거리는 대사’보다 훨씬, 현실적인 정치드라마라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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