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싫은 것과 어쩔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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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싫은 것과 어쩔 수 없는 것
  • 박봉남 독립PD
  • 승인 2010.12.14 0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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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중·동이 싫다. 그들이 가진 힘도 인정하고 그 매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존중하고 기자들의 필력에 감탄도 하고 신세를 진적도 있지만, 결국 나는 싫다. 싫은걸 싫다고 해야지 에둘러서 말할 필요는 없다. 대신 나는 〈시사IN〉, 〈한겨레21〉, 〈위클리 경향〉, 〈전라도닷컴〉 무려 월 4권의 시사잡지를 구독한다. 물론 다 볼 시간도 없을 때가 많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매체를 만들고 있어서 또는 ‘입금이 가장 강력한 연대’라는 누구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어쩌랴, 내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싫기만 한(40대가 넘으면서 PD로서의 이성은 사라지고 감정만 남아버렸다) 그 언론매체들이 조만간 종합편성채널을 시작한다고 한다. 당연히 나는 그 종편채널도 싫다. 같이 일을 하자고 제안이 온다고 해도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 결국 내 개인이 그 매체에서 밥벌이하며 살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종편채널이 출범하게 된 배경과 미디어법의 유효성 여부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가릴 능력이 못된다. 때로 시대의 흐름이란 내 생각과 다르게 가기도 하고 내 생각이 항상 옳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고민스럽다. 감정과 이성적 판단은 때로 달라야 하니까.

지상파 방송사 PD들 대부분은 반대할 것이다. 종편은 태생이 의심스러운 존재였을 터이니 말이다. 그런데 독립PD들 입장에서 보면 기존의 방송사도 마찬가지다. ‘〈인간극장〉 같은 프로그램 우린 줘도 안 만들어요. 만들 사람도 없고 힘들어서 그거 어떻게 해요?’ 모 방송사의 PD가 한 말이다. 그렇다. 너무 힘들어서 줘도 안 만드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현장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독립PD니까 말이다.

나는 사석에서 동료들과 이야기할 때 ‘죽겠다는 하소연 이제 그만 하고 실력으로 보여줍시다’ ‘당신 없이도 이 나라 방송사들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터이니 걱정 마시고 그만두시라’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한국의 방송사는 스스로 변할 가능성이 없으니 힘들면 때려치우던가 아니면 조용히 작품만 하자는 나름의 결기라고 봐주시면 되겠다. 기존의 방송사가 합리적이고 선진적인 시스템으로 창작자들을 끌어안으려고 했다면 독립PD들도 발 벗고 그 대열에 동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명분이 없다. 막말로 종편채널이 기존의 방송사보다 ‘더 나쁜 갑(甲)’이 될지 ‘ 조금은 합리적인 갑’이 될지는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

조중동이 운영하는 종편은 무조건 ‘악(惡)’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대단히 파쇼적이지 않은가? 종편채널이 창작자들에 대한 ‘합리적인 절차와 분배’를 명시하고 실행한다면 그것은 진보이지 않은가? 이런 경우에도 ‘기존의 갑’은 ‘새로운 갑’을 비난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나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반박도 나올 것이다. ‘정신 차려, 이 사람들아. 그들이 어떤 이들인데 당신들에게 그런 거 줄 거 같아?’

이쯤 되면 내 입장도 밝혀야 할 거 같다. 나는 종편채널 관련 일은 안 할 거지만(이건 내 자유니까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동료인 독립PD들에게는 종편과 대화 테이블을 마련하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제안했으면 한다. ‘우리들의 제작 능력을 인정하고 동등한 파트너로 여긴다면 합리적인 절차와 적정한 제작비, 이윤에 대한 정당한 분배를 명시하십시오, 해외시장 개척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전개하고 이 모든 내용들을 표준계약서에 명시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주십시오. 우리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더불어 독립PD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종편채널에 절대 개인으로 투항하지 말고 조직적으로 협상하고 권리를 찾으라고 말이다. 기존 방송사로부터 그렇게 당하고 또 종편채널에 가서 그런 대우를 받는다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모르겠다. 몇 년이 흐른 뒤 지상파 방송사 PD로부터 ‘거봐, 걔네들이 더욱 사악한 갑이었잖아, 그냥 아쉬워도 우리랑 지내자’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지. 지상파 방송사 PD를 불러놓고 ‘거봐, 당신하고 헤어진 게 얼마나 잘한 것인지 모르겠어, 우리 행복하게 잘 지내’라고 말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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