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전쟁 위기의 순간에 리영희 선생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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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전쟁 위기의 순간에 리영희 선생을 생각하다
  • 이채훈〈MBC 스페셜〉PD
  • 승인 2010.12.22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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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오후 2시 반부터 연평도의 사격훈련이 시작됐다. 아직 북측의 대응사격은 없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북측이 ‘도발’해 올지 알 수 없다. 수도권을 향해 쏠지, 핵배낭 같은 걸 터뜨릴지, 최악의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2003년 다큐 〈서해교전과 NLL〉 만들 당시, 故리영희 선생님을 인터뷰하려고 삼고초려 했던 일이 떠오른다. 선생님의 논문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는 NLL에 대해 가장 포괄적이고 정밀한 연구 결과를 담고 있었다. 선생님은 ‘이 논문이 북측의 주장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고발되셨는데, 검찰은 ‘아무 혐의도 없다’며 수사를 하지 않았다. 선생님에 따르면 “논박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끝내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주장이 편집되어 여타의 주장과 나란히 놓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셨다. 다큐 한 시간을 다 주면 인터뷰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입장이 원칙적으로 옳다는 걸 알면서도, 좋은 방송을 위해 조금 타협해 주시면 안 될까, 약간 서운하다, 이런 외람된 생각까지 했었다.

▲ 리영희 선생 영정

선생님의 논리는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NLL은 남북이 합의한 해상 분계선이 아니다. 전쟁이 끝날 당시 북측의 해군은 궤멸되어 바다는 완전히 유엔군이 장악했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이승만의 북침을 우려하여 “이 선을 넘어 북쪽으로 가면 안 된다”는 작전명령을 내렸고, 그 선이 바로 ‘북방한계선’이 됐다. 73년 경 북측의 해군이 재건됐고, 그때부터 북측은 NLL 남쪽 해역이 자기 ‘영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북측이 ‘영해’라고 주장하는 NLL 남쪽 해역은 국제적으로는 ‘논쟁 중인 해역’(Disputed Area)이라 불리게 됐다. 이 문제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에 따라 대화로 해결해야 하며, 평화협정 체결이 뒤따라야 한다.

이러한 선생님의 논지는 유엔군 사령부와 이양호 전 국방장관의 의견으로 뒷받침됐다. 최근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헨리 키신저 등 70년대 미국 고위관리들도 “일방적으로 설정된 NLL은 확실히 국제법에 위배된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양측이 일방적인 주장을 되풀이하며 강경 대치한 결과 1999년, 2002년 두 차례의 연평해전이 일어났고, 올해 11월 23일 비극적인 충돌로 이어졌고, 바로 오늘, 자칫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이 사태의 배경은 북측의 후계문제, 남북관계의 냉각, 국제정세의 재편 등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논쟁중인 해역’에서 일어난 포격이 직접적인 시비를 일으켰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북측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해 군인과 민간인을 살상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할 수 없다. 그러나 북측이 ‘영해’라고 주장하는 해역에 남측이 포격을 가한 것이 북측을 자극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리영희 선생님이 살아 계시다면 뭐라고 하실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평화를 역설하실 게 분명하다. 하지만 청와대, 국방부, 여야 정치인 모두 강경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이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클린턴 정권이 실시한 전면전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개전 초기에 사망자가 100만 명이 넘고 재산 피해는 수조 달러에 이른다.

▲ 이채훈〈MBC 스페셜〉PD

자, 실제로 이런 참화가 일어나면 청와대나 정치인이 책임 질 것 같은가? 언론도 선정적으로 남북 대결을 부추기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PD들이 만드는 프로그램도 극소수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어떤가? 이런 얘기를 하자고 리영희 선생님을 방패막이로 앞세운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돌아가신 선생님께 죄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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