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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독일= 서명준 통신원

2차 대전 이후 독일 최초 아시아지역 특파원을 역임한 기자출신으로 방송 진행자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볼프강 멩게(Wolfgang Menge)는 후일 전설적인 방송극작가로 기록된다.

독일 방송사상 역대 인기 TV수사드라마 가운데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작품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의 역작 <100만 마르크 게임>은 인간사냥을 생중계하는 한 가상 민영TV 프로그램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 속 TV프로그램은 출연자가 자신을 추적하는 킬러에게 잡히지 않고 한 주를 버티면 그에게 100만 마르크의 거액을 상금으로 지급하는 컨셉의 잔인한 프로그램이다. (마르크: 독일 분단시절 통화단위)

도전자를 색출한 킬러에게는 상금 12만 마르크가 주어진다. 킬러는 심지어 도전자의 목숨을 해쳐도 된다. 생포하지 않아도 킬러는 상금을 지급받는다. 이렇게 목숨을 건 쫓고 쫓기는 한 주간의 도전과 사투를 이 프로그램은 밀착 생중계한다. 쫓기는 도전자의 인터뷰도 내보낸다. 그의 피신을 돕거나 킬러에게 그의 위치 정보를 제공하는 적극적인 시청자들도 나타난다.

▲ 1970년 독일 공영방송 WDR에서 방영된 영화 <100만 마르크 게임> 화면캡쳐 ⓒWDR
지난 1970년 독일 공영방송 WDR이 제작·방영해 큰 충격을 줬던 이 영화에서 TV는 인간의 가치를 압도해버린, 한마디로 극단적인 ‘인간의 상업화’를 주도하는 미디어로 참담하게 묘사된다. 민영채널과 ‘시청률 페티시즘’에서 리얼리티TV, 빅 브라더는 물론 단 1분이라도 TV에 나오고 싶어하는 ‘방송출연 페티시즘’에 이르기까지 다소 암울한 오늘의 미디어 현실이 영화 전반에 이미 예견돼 있다.

당시 보수성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의 한 비평기사는 민영방송의 일면만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공영방송의 횡포라고 이 영화를 평가절하했다. 좌파성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FR)와의 인터뷰에서 멩게는 “공포탄이 사용될지언정 언젠가 정말 인간사냥 장면이 TV에서 방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영화가 방영된지 40여년이 지난 오늘 미디어는 어쩌면 그의 전언보다 더 잔인한 콘텐츠를 내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화려한 뉴미디어 시대의 21세기판 ‘게임’은 적어도 독일 공영방송에서는 다시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이 영화가 방영됐던 일요일 프라임타임에는 ‘사건현장’이나 ‘경찰신고’ 등 높은 시청률을 올려주는 착한(?) 공영방송 수사드라마가 이미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다. 평일에도 다소 변동이 가능한 미니시리즈용 편성시간 외에 정말 빈틈없이 치밀하게 구성된 철벽 같은 편성구조 안에 ‘게임’류의 단막극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 독일=서명준 통신원/독일 베를린자유대 언론학 박사
무엇보다 이런 영화가 다시 방영되기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방송의 처절한 자기비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미디어융합시대를 풍자하는 21세기판 ‘게임’을 제작하려는 방송사는 먼저 솔직한 심정으로 통렬한 자기반성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그것이 어렵다면 얼굴에 두꺼운 철판들을 까는 수 밖에 없겠다. 오늘 미디어의 사회문화적 수준이 40년 전에 비해 크게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최근 상업화로 치닫는 미디어 현실을 우려하는 독일 언론학자들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새해에는 학계를 넘어 인간상업화를 주도하는 것이 미디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확신범(!)이 늘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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