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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파동의 정치경제학 시론(下)─ 시청률 지상주의와 제작자율성 ─

|contsmark0|<본지 230호 上편 ‘연예자본의 거대화와 그 탐욕적 본성’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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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어디선가 이번 ‘노예’파동을 ‘옛 왕초(방송사)’와 ‘신흥주먹(연예 자본)’의 다툼에 비유한 글을 본적이 있다. 다소 시니컬하기는 하지만 이번 파동의 핵심 문맥을 그보다 정확하게 읽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contsmark3|바로 그 ‘신흥주먹’이 어떻게 ‘옛왕초‘를 제치고 한국대중문화의 실질적 기획자로 등장하였으며, 그 탐욕적 본성이 파행적인 스타 시스템을 통해 여하히 관철되는가를 짚어본 것이 지난번 이야기였다.
|contsmark4|그렇다면 이젠 다음의 의문들이 들어설 차례다. ‘옛왕초’는 왜 역전(逆戰)을 방치하고 있었는가? ‘옛왕초’의 조직원인 우리 pd들이 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제작의 자율성을 다시 말하는가? 단순한 패거리 의식의 발로가 아님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contsmark5|방송은 왜 연예자본에 휘둘리게 됐나?
|contsmark6|연예산업은 ‘연예인이라는 상품을 가공해 널리 알림으로써, 음반·캐릭터·관람권 등의 상품을 팔고, 출연료·광고 모델료 등을 챙기는 서비스업’이다. 따라서 공중파tv는 연예인이라는 상품을 시장에 진입시키는 1차관문이자 교두보이다. 모든 가정의 안방마다 촉수를 뻗치고 있는 tv에 출연하는 것은 곧 해당연예상품에 이미 대중성과 공신력이 보장되었음을 의미한다.
|contsmark7|이때에야 비로서 연예인은 사용가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이 되고, 연예자본은 다른 자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속도로 자기를 증식하는 불가사의한 자본이 된다.
|contsmark8|이러한 사실로부터 거대 방송사는 연예자본에 대해 일반적인 우위를 누리게 되고, 그 조직원인 연예오락 pd들도 우월적인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는 방송사들의 우위가 흔들리고 있는가?
|contsmark9|주지하다시피 그 직접적 계기는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화, 탈규제, 경쟁 지상주의 담론이 횡행하는 가운데 탄생한 상업방송 sbs의 등장. 그에 따라 기존의 국가독점적 구조가 허물어지고 방송사간의 산업적 경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contsmark10|뒤이어 다매체, 다채널의 기치아래 catv, 지역민방, 위성방송이 속속 등장했고 영화 음반등 연예산업의 모든 영역에 국내의 자본이 손을 뻗쳤다. 내용과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생략된 방송의 양적팽창과 그에 따른 무한경쟁의 이전투구! 그것이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contsmark11|사회일각의 천박한 무한경쟁논리는 방송계에서 곧바로 천박한 시청률 지상주의로 변안되었다. 부정확한 양적지표인 시청률만으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를 평가하는 자본의 척도 시청률! 방송사들은 앞을 다퉈 국제경쟁력과는 사실상 무관한 오락프로그램들을 주력시간대에 집중편성했다.
|contsmark12|생존의 위협을 부풀리며 자사이기주의, 자기프로 이기주의를 부추켰다. 시청률지상주의를 도구삼아 민주화로 약화된 자신들의 노동통제력을 강화하고, 붕괴위기에 처한 낡은 사내구조를 유지하는데 활용했다.
|contsmark13|반면 그때까지만 해도 실질적인 제작자일 수 있었던 일선 pd들은 자신들의 안목과 결정권을 다시 반납해야 했다. 시장이 유일한 최고의 비평자로 자리를 잡으면서 프로그램의 질에 대한 고민과 제작여건의 개선은 한가한 소리로 치부당하기 일쑤였다.
|contsmark14|시청률에 도움이 되는 코너들을 빠짐없이 서로 베껴 비슷비슷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연예자본이 제조한 ‘스타’를 모셔오기에 골몰하는 최고의 관행들은 그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contsmark15|그리고 이제 연예자본만큼의 치밀한 시장조사도, 현장 기획력도 없고, 장기적인 투자는 엄두도 못내는 허울 좋은 공영방송은 결국 대중문화에 있어 기획과 선도라는 위상을 과감히 포기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연예자본이 제공해주는 상업성 있는 콘텐츠를 조립, 전시해내는 편이 훨씬 쉽고 성공(?)률도 높기 때문이다.
|contsmark16|저급한 연예자본과의 공생을 통해 그나마 일정한 영향력이라도 유지해 보자는 방송사들의 계산. 그것이 시청률지상주의의 또 다른 동기였다.
|contsmark17|기로에 선 제작자율성
|contsmark18|방송계에 자본의 손길이 미친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 결과는 어떤 모습인가. 대외적으로는 사적 독점을 완성해가는 연예자본에 의해 대내적으로는 시청률 지상주의라는 또다른 자본의 압력에 의해 안팎으로 곱사등이가 돼있는 것이 오늘 우리 pd들의 자화상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contsmark19|시청률의 사슬에 묶여 더 이상 대중문화의 지형을 그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포기해야 할 단계에 이른 것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율성’의 현 주소가 아닌가? 아니 어쩌면 싸우면서 닮는다고 언제부터인가 스스로도 마취돼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 지, 꿈도 자부심도 없이 헷갈리는 회사원’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contsmark20|그렇다고 개선의 전망을 찾기는 너무도 어렵다. 날로 강화되고 있는 사회전반의 소비지상주의, 경쟁력 유일주의 풍토 하에서 자본이 강요하는 상업적 획일성의 압박은 날로 강화되기만 하다. 끊임없이 시장과 소비의 환상을 주입하며 이 모든 변화를 내부에서 추동하는 미·일 연예자본의 개방압력은 해를 달리하며 거세지고 있다.
|contsmark21|광고주들은 이미 특정상품을 직간접적으로 홍보하는 장면의 연출과 프로그램내 삽입(ppl=product placement)을 공공연하게 관철시키는 정도에 이르고 있다.
|contsmark22|대중문화의 권력은 이미 그들의 손안에 있고, 다양성·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문화주의의 목소리는 계속 잦아든다. 군사독재 시대 이래로 역사의식, 사회의식을 갖춘 대중문화인은 거의 찾아보기도 힘들고, 그나마도 시대착오적인 법률과 관행적 금기 등에 의해 추진하기가 극히 어렵다.
|contsmark23|상업주의와 낡은 관치의 절묘한 결합! 이 지극히 한국적인 모순구조 속에서 오늘 우리의 제작자율성은 이미 그 토대에서부터 껍데기만 남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contsmark24|지난 80년대와 90년대, 우리 pd들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얻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 성과가 충분히 가시화되기도 전에 우리 앞엔 훨씬 더 어려운 과제가 가로놓여 있다.
|contsmark25|자본, 그리고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한 권력으로부터의 자율! 그것은 과연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이번 ‘노예’파동을 보면서 필자는 우리 앞에 닥쳐올 미래가 마냥 암울할 뿐이다. 정녕 너무 과민한 탓일까.
|contsmark26|이강택 kbs 편성국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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