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미 피비린내로 가득한 링의 풍경. 때는 바야흐로 3라운드가 시작되기 전의 살풍경한 휴식시간. 청코너 한국은 천안함과 연평도로 기억되는 1,2회전의 아픈 실점을 만회하기위해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인파이터로의 변신을 도모하며 뼈아픈 상처를 더듬고 있고, 홍코너 북한은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 식의 아웃사이더 전법을 계속 끌고 갈지를 고민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청코너 한국의 뒤에는 미국이, 홍코너 북한의 뒤에는 중국이 흥미진진한 경기를 지켜보며 때론 코치를 하고 때론 질책을 하면서 물러 설 수 없는 한판 대결의 흥행사 역할을 하고 있다. 중립 코너의 한 쪽에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는 탐욕스런 눈빛의 일본이 버티고 있고, 다른 한 쪽은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기웃거리는 러시아가 차지하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싸움을 즐기는 모양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신냉전이 초래한 오래된 미래의 풍경이다. MB정권의 출범 이후 예견된 미래였지만 이렇게 빨리 그리고 쉽게 전쟁의 위기가 닥쳐오리라는 예상을 한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7000만 남북 민중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한 어처구니없는 구시대적 대결 구도의 재현은 이제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실체적인 전쟁의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이 난을 통해서 동북아 전쟁의 개념을 거칠게 표현한 적이 있다. 임진왜란과 한일 합방, 그리고 한국전쟁이 모두 동북아를 둘러싼 열강들의 세력 다툼이 빚어낸 국제 전쟁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몰락을 틈탄 일본 신흥 군사 막부 정권의 야욕에서 비롯되었고, 한일 합방은 대동아 공영국을 꿈꾸는 신흥 제국주의 세력인 일본이 기존의 서방 제국주의 세력들과 동북아를 두고 야합과 타협을 추진하다가 이해관계가 부딪히면서 발생한 식민전쟁이었다. 그러면 한국전쟁은 어떠한가?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이 한반도를 전선으로 두고 맞붙은 대리전의 성격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모든 3차에 걸친 동북아 전쟁의 공통점은 한반도 민중의 뜻과는 상관없이 한반도가 전장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강들은 자국의 영토에서 전쟁을 벌이기보다 지정학적으로 전선이 형성되는 한반도라는 물리적 영토에서 벌어지는 대리전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이 고민에서 역사를 망각하면 과거만 잃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잃어버린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만약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열강들의 다툼 속에서 한반도가 전쟁터를 제공하는 전철을 되풀이한다면 이 곳 ‘한반도’라는 공간적 영토의 훼손과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절멸을 가져올 수 있다. 그야말로 선사시대 이전의 구석기시대의 역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람시가 이야기했던 ‘헤게모니’의 전환이든, 아리기가 설파했던 ‘장기 20세기’의 관점이든, 세계 권력의 재편기는 세계사적인 전쟁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던 것이 인류사의 숙명이었음을 익히 보아 왔다. 권력 혹은 헤게모니가 서양에서 동양으로,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양되는 인류사적인 대변혁의 과정 속에서 한반도는 신냉전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열전(hot war)의 그라운드가 될 가능성이 높다.

▲ 김욱한 포항MBC 제작팀장

미국이라는 초거대 제국의 몰락이 기정사실화 되는 이 아찔한 절체절명의 전환기를 우리 민족이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 위기 타개의 첫 걸음은 남북한 모두 죽음의 링에서 뒤돌아보지 말고 과감히 뚜벅뚜벅 걸어 내려오는 것이다. 링 위의 꼭두각시 선수가 되지 말고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원탁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그게 G20 국가의 위상이고 힘이고 권리이고 존엄이며 국민들의 요구이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