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세옥의 헛헛한 미디어]

리턴매치(return match)는 현실화할까.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광재 강원도지사가 지난 27일 대법원으로부터 유죄 확정판결을 받아 지사직을 상실하면서 오는 4·27 재·보선에 여야 정치권은 물론 방송·언론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까진 타천 거론이긴 하지만 앞뒤로 나란히 MBC 사장을 지낸 인사 둘이 여야 후보로 강원지사 재·보선에서 맞붙을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까닭이다. 바로 엄기영 전 MBC 사장과 역시 MBC 사장 출신인 최문순 민주당 의원(비례대표)다.

엄기영 전 사장 ‘침묵’ 지키고 있지만 정치권은 출마 기정사실화

일찌감치 여당의 강원지사 후보로 거론돼 온 쪽은 엄 전 사장이다. MBC 간판 앵커 출신으로 지난 2008년 3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MBC 사장직에 있었던 엄 전 사장은 지난해 8월부터 춘천으로 주소지를 옮긴 후 이 지사 낙마에 대비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 엄기영 전 MBC 사장 ⓒMBC
김우룡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우연찮은 고백에 의해 사실로 드러난 정권의 MBC 개입 때문에 사장직을 수행하는 내내 정권과 불화를 거듭했던 그이기에, 민주당은 지난해 7·28 재·보선 당시 최고의 격전지였던 서울 은평을에 자당의 후보로 엄 전 사장을 출마시키려 애를 썼다.

하지만 엄 전 사장은 민주당의 구애에 응하는 대신 강원지역 7·28 재·보선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한 이의 선거사무소를 방문하는 등 의외의 행보로 자신의 뜻을 에둘러 표현했다는 평가다. 지난해 12월부터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곳곳에 얼굴을 비치고 있으며, 지난 25일에는 파란색 점퍼를 입고 KBS 1TV <아침마당>에 출연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한나라당의 상징색은 파란색이다.)

물론 엄 전 사장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강원지사에, 그것도 여당의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말을 입 밖에 낸 일이 없다.

춘천으로 주소지를 옮긴 것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 활동을 하는 것도 “심장을 빼서라도 고향에 봉사하고 싶다”는 마음의 발현일 뿐이(라고 한)다. 구구한 억측에 억울하다는 표현도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했다. 하지만 말보다 행동이 더 정확할 때가 없지 않다 보니, 정치권 안팎에선 그의 일련의 행보가 “(여당 후보로서) 출마의 초석 닦기”로 해석되는 상황이다.

6년 만의 리턴매치…흥미진진함을 위해 버려져야 할 언론 자존심

정치권 안팎의 관측처럼 엄 전 사장이 강원지사에 출마한다면 그 파괴력은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무려 13년 동안, 매일 저녁 9시 브라운관에 등장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와 같은 유행어(?)까지 탄생시킨 엄 전 사장이 이미 선거의 필승조건인 대중성과 친화력 모두를 갖추고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민주당에선 이 지사의 지사직 상실이라는 쇼크에서 벗어나기도 전, 역시 MBC 사장 출신으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된 방송·언론 장악 논란에 맨 앞줄에서 정면으로 맞서왔다는 평가를 받는 최문순 의원을 엄 전 사장의 대항마로 내세우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부터 나오는 실정이다.

최초의 노조위원장 출신 사장으로 기록돼 있는 최 의원은 엄 전 사장에 앞서 지난 2005년 2월부터 3년 동안 MBC 사장을 지냈다. 엄 전 사장의 춘천고등학교 5년 후배인 최 의원이 MBC 사장에 임명됐을 당시 이들은 사장 후보로 이미 한 차례 경쟁한 바 있다. 만약 엄 전 사장과 최 의원이 강원지사 재·보선에 맞붙는다면 리턴매치가 되는 것이다.

같은 MBC 사장 출신의 고교 선·후배 사이인 이들의 리턴매치가 성사된다면, 이는 분명 흥미진진할 것이다. 하지만 흥미진진함을 위해 감수해야 할 폐해가 너무도 크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먼저 언론인으로서의 MBC 구성원들의 자존심 문제다. 최 의원이 현재 방송·언론인들이 주장하는 정권의 방송·언론 장악 시도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행동하는, 이른바 ‘언론개혁’을 담당하고 있는 야당 의원으로 꼽히긴 하지만, 그가 지난 2008년 18대 총선 직전 방송·언론계에서 정치권으로 직행한 탓에 폴리널리스트(polinalist)란 꼬리표를 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MBC 구성원들은 국회의원으로서 최 의원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전직 사장이 곧장 정치권에 직행한 데 대한 부담을 일정부분 안고 있다. 김재철 MBC 사장의 19대 총선 출마설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엄 전 사장마저 언론인으로서 쌓은 자신의 명성을 바탕으로 정치권에 진입할 경우, MBC 구성원들은 자칫 3명의 사장이 연달아 정치권에 직행한 역사를 멍에처럼 짊어지고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리턴매치 승부 관계없이 정권은 웃는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리턴매치에서 어느 쪽이 이기느냐와 상관없이 지금 MBC를 비롯한 수많은 방송·언론인들이 저항하고 있는 대상, 즉 정권에 면죄부를 안겨주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엄 전 사장은 사장직을 수행하던 1년 내내 정권과 불화했다. 정권에 의해 임명된 김우룡 전 이사장이 우연찮게 고백한 것처럼 정권이 MBC의 인사 문제에까지 개입한 탓이다.

실제로 엄 전 사장은 자진 사퇴 형식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난 직후인 지난해 2월 1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방문진이 방송의 독립성, 자율성을 부정하고 특정인을 (제작·보도본부장에) 앉히겠다고 고집한 것은 섭정을 넘어 방송에 대한 직접 경영이나 다름없다”, “방문진 이사장이 관행을 무시하고 MBC 이사진 선임에 개입해 누구를 앉혀야겠다고 고집하면 당연히 정치적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등 정권의 MBC 개입을 강하게 비판했다.

엄 전 사장은 사장직에서 물러날 당시에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후배 언론인들을 향해 불끈 쥔 두 주먹을 높이 들고 “화이팅”을 외쳤다.

이처럼 정권으로부터 박해받은 언론인의 대표 인물처럼 인식돼 있는 엄 전 사장이, 자신을 위해 싸워왔고 현재도 싸우고 있는 후배 언론인들에게 징계·소송 등을 남발하고 있는 주체와 손을 잡고 그들의 우산 아래에서 선거에 출마한다면, 설사 그가 선거에서 석패한다 하더라도 정권 입장에선 크게 아쉬울 건 없다. 결과를 떠나 ‘우리가 언론인들을 탄압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탄압의 대상자였던 이가 우리 당 소속으로 출마를 했겠느냐’는 명분은 챙길 수 있는 까닭이다.

휴정(休靜) 서산대사는 선시(禪詩) ‘답설야’에서 이렇게 말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 눈 덮인 들판을 지날 때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

엄 전 사장은 지난 2006년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불출마 선언을 하며 <기자협회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기자로서, 언론인으로서 선전해 온 인생을 언론인으로서 마치고 싶다”고 했다. 또 “언론의 위상과 위신은 스스로 높여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이미 서산대사의 ‘답설야’에 담긴 뜻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리턴매치의 현실화에 앞서 엄 전 사장이 과거 자신의 말을 돌아보길 바라는 까닭이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