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할 말이 없으면 쓰질 말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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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에 글을 쓰면서 이렇게 오래도록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던 적이 있나 싶다. 그러고 나서 결국 잡은 제목이 ‘할 말이 없다’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무성의해 보여 뒤에 좀 더 덧붙인 게 ‘쓰질 말아야 한다’니 내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한심한 것은 한심한 것이고, 안 한심한 척 하는 것보단 덜 한심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니 다소 냉소적이라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편이 낫다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 짧은 분량의 글을 쓸 수가 없기도 하고.

흔히 ‘언론은 죽었다’라고 표현하며 제대로 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언론의 자성을 촉구하는데, 요즘 언론의 분위기를 보면 단지 ‘죽었다’라는 표현만으로는 그 처참한 실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죽어도 한참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살이 썩어 문드러진 것만이 아니라 뼈까지 삭아 버렸다고 해야 할까? 흔적조차 남지 않아 무덤을 파도 거기에 정말 ‘언론’이란 시체가 매장되었는지 알 길이 없을 지경이다.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정권 홍보에 열을 올린 수없이 많은 방송들과, 정권 홍보 거리가 없는 시기엔 선정적인 내용으로 채우기 바쁜 방송들. 누가 더 나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하향 평준화되어버린 나쁜 방송들은 이제 어느 채널을 돌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겠으나 핑계는 있되 무덤 속 시체는 없는 그런 방송들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걸 ‘방송’이라는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만으로 싸잡아 이야기하기엔 그 방송의 구체성을 채워 넣은 수많은 방송인들의 수가 너무나 많다. 이제 어느 누구도 특정 프로그램을 지적해서 비판하기를 꺼려할 만큼, 특정 언론인을 지목해서 비판하기를 꺼려할 만큼 너 나 할 것 없이 직간접적으로 나쁜 방송 만들기에 연루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어디서부터 무엇을 바꿔야 할지, 어떤 점을 고쳐야 할지 말하는 것 자체가 소모적이다. 밑도 끝도 없이 ‘잘하자!’라고 외치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짐짓 모른척하며 나아질 거라고 말하는 것 역시도 이젠 지칠 뿐이다. 잘 할 것도, 나아질 것도 없는데 백날 떠들면 뭐하나? 입만 아플 뿐이고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거야 말로 더욱 스스로를 지치게 한다.

차라리 이럴 땐 ‘할 말이 없으면 쓰질 않는’ 태도가 낫다. 이길 수 없다면 지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자기기만과 자기 합리화, 그리고 모른 척 하기에 에너지를 소모할 바엔 묵비권을 행사하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말이다.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인 언론에게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때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강력한 메시지 표현이라는 점에서, 또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점에서 이제 그만 불필요한 말을 하는데 쓰는 에너지를 거두길 권한다.

또한 (변명일지 모르지만) 언론의 사명이 비판만은 아니다. 긍정의 에너지를 찾아서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 역시 언론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감춰진, 그러나 너무나 강력한 긍정의 에너지들을 발굴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면 비록 언론 스스로 직접적인 비판에 무기력하다 할지라도 최소한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바꾸고자 하는 긍정의 에너지가 주눅 들지 않도록 힘이 되어 줄 수가 있다. 주인공이 아닌 좋은 조연으로서의 역할은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다시 언론에게 피드백으로 돌아와 언젠가 다시 제정신을 찾을 수 있는 밑천이 될 것이기도 하고.

▲ 김진혁 EBS PD

우리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은 올바름을 실천하기 위하여, 작은 인간애를 실현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해 애쓰는 많은 이들이 있다. 할 말 없으면서 억지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자. 그분들이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알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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