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검 조작 모티브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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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검 조작 모티브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인터뷰] SBS ‘싸인’ 연출에서 극본 맡은 장항준 감독
  • 정철운 기자
  • 승인 2011.02.22 1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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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산 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진실을 말했고, 그 진실은 강렬했다. SBS 수목드라마 <싸인>(연출 김형식, 극복 김은희 장항준)이 매회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PD저널>은 <싸인>을 통해 처음 드라마 연출에 도전한 영화감독 장항준을 만나 제작 의도와 영화· 드라마 간 제작의 차이점 등을 물었다. 장항준 감독은 1화부터 10화까지 연출을 맡았지만 현재는 부인 김은희 작가와 함께극본을 쓰고 있다. 인터뷰는 지난 17일 오후 강남에 위치한 모 커피숍에서 진행됐다.

▲ 장항준 감독 ⓒSBS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아이템, 10년 전부터 기획”

그를 만나기 전 제일 궁금했던 건 <라이터를 켜라>(2002)로 데뷔에 성공한 이후 예능프로그램 등을 통해 줄곧 코믹한 이미지를 이어온 장항준이, 굳이 시체를 해부하는 수사물을 선택한 이유였다.

장항준 감독은 기자의 궁금증에 대해 가볍게 응수했다.  “영화를 하는 사람은 모두 히치콕의 후예다. 코미디를 했다고 해서 스릴러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1990년대 말부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 관련 아이템을 기획했다. ‘죽은 사람을 해부하는 직업’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10년전 자료조사를 위해 처음 국과수를 찾아간 장 감독은 한 법의관을 만났다. 그는 인상깊은 한 마디를 던졌다.

 “(사람들이) 우리를 혐오스러운 일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는 죽은 사람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 말 못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친구다.”

강렬한 한 마디는 그에게 울림이 되었다. 장 감독은 국과수가 등장하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작품을 제작하느라 시기를 놓쳤다. 그러던 중 2009년 가을 경 드라마 제작사와 접촉 후 <싸인> 연출이 결정됐다. 김은희 작가와 함께 7~8명의 법의학자를 만나 자료 조사를 하고 2010년 1월부터 본격적인 작품준비에 들어갔다.

“부검 조작 모티브, 박종철 살인사건에서 얻었다”

<싸인>에 등장하는 사건을 ‘부검’해보면 저마다의 ‘사회적 메시지’가 들어있다. 제작발표회에서도 <싸인>의 모토는 ‘메스로 사회를 해부한다’였다. “사회 문제를 이야기 하지 않는 것조차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라 말한 장항준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적극 반영하려 노력했다. 미군 총기 사건의 경우 미군 문제를 드라마 전면에 드러내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소재였고, 대기업 직원들의 독극물 연쇄 살인 사건은 극단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사주의 부도덕성을 고발했다. 이명한과 윤지훈의 대사는 정의에 대한 논쟁의 향연으로 가득하다. 장 감독은 “이왕 문제작이 될 바에 까놓고 하자”는 취지였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19살에 경험한 1987년 민주화 항쟁과 무관하지 않다. 장항준은 박노해, 김남주의 시를 경험한 세대다. 학창시절부터 쓰기 시작한 시는 그의 정신적 고뇌의 산물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썼다. 그 때는 참여시냐 순수시냐를 두고 양분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는 “<싸인>에서 시체 부검을 조작한다는 모티브는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에서 얻었다”고 한다. 당시 5공 세력은 박종철 군을 고문으로 살해한 후 시신을 빼돌리고 ‘사인’을 조작한 바 있다. 당시 시민과 학생들이 시신의 ‘진실’을 지키려 했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장항준 감독은 “<싸인>의 시대배경을 80년대로 하려했는데 제작비가 두 배로 뛰어서 포기했다”며 웃었다.

▲ SBS <싸인>의 촬영 장면 ⓒSBS
드라마와 영화, “카메라로 찍는 것 빼고 다 달랐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며칠 밤을 새면서 드라마가 얼마나 힘들게 만들어지는지 생각을 많이 했다.” 제작비보다 큰 문제는 영화 촬영과는 스케줄이나 연출 면에서 확연히 달랐던 촬영과정이었다. 드라마 연출은 처음이었던 장 감독은 “영화는 후반 작업만 두 달 석 달이 걸리는데, 드라마는 매주 개봉하는 느낌이었다”며 그간 어려웠던 경험을 떠올렸다.

제작발표회 당시 1회 반 분량 정도 촬영을 마친 상태였지만, 그마저도 재촬영이 필요했다. 영화에서는 원신 원커트 ‘롱테이크’가 환영받지만, 드라마에선 생소한 이야기였다. 영화는 스크린 크기 때문에 클로즈업을 지양하지만, 드라마는 스크린이 작아서 거의 바스트로 커트가 진행됐다. 영화와 달리 촬영 당일 세트를 처음 보고 마음에 안 들어도 당장 찍어야 했다. 후반작업도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장 감독은 “인물 촬영에서 줌으로 찍는다고 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더라. 10회 동안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드라마와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잠을 잘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는 “드라마는 체력전이다. 체력이 안 되면 사고가 마비된다. 극심한 체력 소모 속에서 현명하게 판단해야 하는 직업이 드라마 PD였다”고 말했다. 장 감독은 <싸인> 10회분을 촬영하며 세트장 이동 중에만 차 안에서 겨우 잘 수 있었다. 그는 이처럼 살인적인 제작환경이 지속되는 이유로 “우리나라는 지독한 환경에서 유독 잘 해내는 능력을 가진 것 같다. 근현대사 자체가 투쟁의 역사다보니 격변하는 정세에서 살아남는 법을 갖게 된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국과수 지원이 드라마의 중요한 목적”

장항준 감독이 <싸인>을 통해 바라는 것은 극중 이명한과 마찬가지로 ‘국과수의 지원과 발전’이다. “드라마가 잘 되면 법의학 지원도 잘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보통은 산 사람을 살리는데 관심이 많지만 죽은 사람의 죽음을 규명하는 게 얼마나 사회 정의에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야 한다.” 장 감독은 국과수에 법의학자가 스무 명도 채 안 되는 현실을 지적하며 미국드라마처럼 수사를 할 수 있게끔 사회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김아중과 함께 대본을 보고 있는 장항준 감독 ⓒSBS
장 감독은 “법의학자가 보면 ‘말도 안 돼’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 드라마가 CSI지만 이 드라마가 미국 법의학계의 장비와 시설, 의식 부분의 발전에 공헌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드라마를 통해 “법의학자들의 과도한 업무량이 나아졌으면 좋겠다”며 “실제 법의관들은 다들 긍정적이고 너무 좋은 사람들”이라며 이들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그는 마지막으로 현재 국과수 시스템에서 부검 결과 조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줄 것”을 당부했다. 장항준 감독은 <싸인>을 ‘멋있게’ 마무리 한 뒤 다시 영화로 돌아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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