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대지진을 ‘하나님의 경고’로 해석하는 개신교 대형교단의 발언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더 무서운 점은 그런 주장에 깊이 공감하는 신도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현대 한국의 개신교, 특히 대형교회의 신앙은 마치 근본주의처럼 여겨진다. 근본주의는 믿음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믿음이 다른 이들에게 차별은 마땅할뿐더러 징벌을 내리는 것조차 신이 주신 거룩한 사명으로 여긴다.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심오한 논쟁을 벌이려는 것이 아니다. ‘나 혹은 우리만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다. 종교적 신념의 선택 혹은 깨달음은 참과 거짓으로 규명하기 어려운 개개인의 주권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는 다양한 믿음과 종교적 깨달음이 공존한다. 스스로의 영성 정진을 뛰어 넘어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타인의 신념을 배척하는 행위는 곤란하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의 다름을 이유로 행해지는 신성한(그렇게 주장하는) 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같은 신을 섬기는 가톨릭은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신학자 한스 큉)고 이미 밝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구원이 교회 밖에서도, 예수를 떠나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믿음이 공존하는 인류 공동체에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못해, 결국 끝없는 갈등과 분쟁으로 점철되었던 과거 인류 역사에 대한 통렬한 자각과 반성에서 비롯된 인식일 것이다.

가톨릭은 인정하는 구원의 다원성을 한국 개신교 대형교단은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지각 있는 신앙인의 진지한 저항을 목격한 기억도 많지 않다. 반드시 신앙만의 문제일까?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신도수가 몇 만을 넘는 대형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를 이룬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리고 결혼은 물론 크고 작은 경제활동 등 삶을 이루는 필수 절차가 모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완결적 공동체다. 마치 하나의 작은 국가처럼 여겨지는 그 곳에서 교단의 지도자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신념과 용기를 넘어서는 성질일 것이다. 북한의 3대 세습을 규탄하면서도, 재벌의 3대 세습은 물론 대형 교회의 대를 이은 담임목사 세습에 이견을 들을 수 없었던 근본적 이유가 아닐까?

▲ 공태희 OBS 예능제작팀 PD

개신교단의 대형교회는 자체의 자본으로 언론사를 소유하는 등 막강한 세속권력까지 구축했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십자군 전쟁으로 공공연히 묘사하고, 비기독교 국가의 자연재해를 ‘신의 징벌’이라고 했다. 이슬람국가에서 그들의 신앙을 무시하는 포교활동으로 인질이 되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제는 공공연히 대통령 하야를 공표하며 장로 대통령을 무릎 꿇리더니 가까운 이웃의 불행마저 ‘신의 경고’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그들은 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인간은 사랑하지 않는 듯하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의 가르침보다는 신의 영광을 높이는 것만 귀중히 여기는 것 같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