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방송 말하며 불공정 계약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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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영국= 장정훈 통신원

공정사회, 공정무역, 공정거래는 미디어를 통해 가장 흔히 회자되는 단어중 하나일 거다.

‘공정’은 모든 방송의 근간이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공정한 사회를 보여주며 희망을 던져주고, 공정하지 못한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며 시정을 촉구하기도 한다. 시청자들도 방송에 ‘공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공정성’은 방송이 다루는 소재에 대한 공정성, 화법에 대한 공정성일 것이다. 당연한 요구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방송계에서 이른바 ‘갑’이라 불리는 존재에게는 거기까지인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공정을 논하는 프로그램의 제작과 유통에 얼마나 심각한 불공정과, 불편부당함이 존재하는지는 잘 감추어져 있으니 말이다.

▲ 영국 공영방송 BBC 홈페이지
영국의 공영방송 BBC 웹사이트에서 외주제작(Commissioning)에 관련한 부분 (http://www.bbc.co.uk/commissioning/)을 들어가 보면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과 유통에 관해 꼼꼼하게 정리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프로그램 기획서를 어디에 어떻게 제출하면 되는지, 얼마의 제작비를 받을 수 있으며, 그 제작비는 어느 시점에 어떻게 지급이 되는지, 계약서는 어떻게 생겼으며 협찬에 대한 규정이 어떻게 되는지, 자막은 규칙이 어떻게 되며, 제작과정에 대한 보고는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마스터 테이프의 전달 시점과 함께 제출해야 할 서류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까지 실로 방대한 분량이지만 일목요연하다.

편집 가이드라인도 볼 수 있다. 심지어 이러한 내용은 방송관계자뿐 아니라 일반인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공개하고 있다. 최근엔 이-커미셔닝(e-Commissioning)이라는 걸 만들어서 프로듀서나 제작사가 온라인으로 기획안을 제출하고, 제출된 기획안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수시로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까지 구축해 놓았다.

BBC는 매년 1만 여건에 이르는 기획안을 받고 있다. 인력과 시간에 물리적인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한 시스템이 바로 이-커미셔닝이다. 이는 외부 독립프로듀서뿐 아니고 BBC 내부 프로듀서도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BBC는 이-커미셔닝에 대해 “제작자와 BBC간의 소통 과정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지도록 돕는 획기적인 시스템”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외주제작에 필요한 계약서 역시 공개되어 있는데, PACT(독립프로듀서연합회)와 합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계약서의 형식과 내용을 모두 볼 수 있다. 계약서에서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는데 ‘갑과 을’이라는 표현이 없다는 거다.

오직 “BBC와 프로덕션 혹은 프로듀서”라는 표현이 있을 뿐이다.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존중하며 일하고자 하는 동지적 관계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런 계약서엔 제작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제작비를 어떻게 나누어 지급해주고, 저작권과 사용권 관계는 어떻게 나누는지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한국에선 종합편성채널이 올해 안에 방송을 시작한단다. 그런데 종편이 대한민국의 미디어 산업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까에 대해서는 많이들 회의적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편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독립제작사와 독립PD들이다. 불공정한 제작환경과 보상에 ‘을’로서의 설움이 큰 까닭일거다.

방송의 국제화, 선진화가 목표라면 종편에 앞서 이제까지 미뤄져 온 제작 및 유통 관련 표준화 작업을 먼저 마쳐야 한다. 하다못해 표준계약서 하나라도 빨리 만들어야 한다. 적지 않은 예산이 들것이다. 하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다.

▲ 영국=장정훈 통신원 / KBNe-UK 대표
누가 해야 할까? 앞서 이야기 했다시피 영국은 독립PD협회와의 협력과 동의를 바탕으로 BBC가 선도하고 있다. 한국의 BBC를 자칭하는 모 방송사의 책임회피가 언제까지나 계속돼선 안 된다. 그런 무질서한 관행을 보면서 수수방관하는 정부도 책임을 면할 수 없고 말이다.

봄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착취의 현장을 촬영하면서 한 치도 다를 게 없는 자신의 처지에 한숨지었다는 한 독립PD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그는 갑도 을도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대한민국의 정직한 독립 PD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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