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김정일 위원장이 인정한 남한의 PD, 김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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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김정일 위원장이 인정한 남한의 PD, 김재형
  • 오기현 SBS PD
  • 승인 2011.04.18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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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현 SBS PD
고 김재형 PD ⓒSBS

김정일 위원장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이명수 작전국장과 김용순 비서에게 ‘남쪽의 텔레비 사극 〈여인천하〉를 몇 편까지 봤느냐’고 묻자 각각 30편과 29편까지 봤다고 대답했다.

“나는 <여인천하>를 80편까지 봤는데, 아주 잘 된 작품이에요. 모두 다 보라고 권했습니다. 나는 특히 〈여인천하〉가 매번 마지막 장면에 여자 주인공의 표정을 부각시키는 게 인상적입디다.”

(임동원 2008, 피스메이커, 629쪽)

2002년 4월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 제 1호각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임동원 국정원장등 남한측 특사일행에게 한 발언이다.

북한지도자의 관심은 북한의 고위관료들에게도 전해져서, 우리가 평양을 방문할 때 북한 관료들은 종종 〈여인천하〉를 화제에 올리곤 했다. 김재형PD가 연출한 <용의 눈물>을 화두로 끄집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에 북한고위층 사이에서 ‘남한의 사극’과 ‘김재형PD’는 남한의 문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키워드였던 셈이다.  

▲ 고 김재형 PD ⓒSBS
그러던 중 2001년 11월 김재형PD가 사극 <연개소문>제작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는 기사가 떴다. 김재형PD를 비롯한 일행들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측과 ‘연개소문’의 일대기를 담은 드라마를 100부작 제작하고 총연출을 김재형PD가 맡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고구려 성이 남아 있는 북한에 세트를 짓고 비용은 남한측, 방송장비와 인력은 북한측이 지원한다는 구체적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방북직후 김재형 PD는 한 일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무척 흥분되지만 건국 이래 남북한이 함께 만드는 첫 드라마여서 부담도 된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중국 당나라의 침입에 맞서 고구려 제국을 수호한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남북한이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남북한이 공유하는 주요한 문화콘텐츠이기도 하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분단을 넘어 프로그램 제작의 새 장을 개척하려는 그의 시도는 신선했으며 ‘김재형PD’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는 추측이 분분했다.

그러나 남북한이 공동으로 드라마를 100편이나 제작하기에 당시 환경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것은 북한의 최고지도자의 관심여부와는 다른, 프로그램 제작의 ‘현실적인 여건’ 문제였다.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 한 편 제작에도 온갖 예상치 않은 장애가 튀어나와 완성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평양 땅에서 대하사극 제작은 불가능해 보였다. 당시 남북교류협력단 소속이었던 필자는 SBS 간부를 통해 ‘우려’를 전달했으나, 김PD의 의지는 워낙 확고했다. 회사내에서는 필자를 대박가도(大舶街道)의 방해꾼으로 보는 시각마저 있어서 성공을 기원하며 비껴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 평양을 방문한 필자는, 김재형PD가 여전히 남북합작드라마 제작을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얘길 들었다. 당초 진행하였던 사극 공동제작은 북한측의 ‘협잡꾼’이 개입되어 무산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김재형PD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는 후일담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북한에도 협잡꾼이 있어 남북교류 분위기에 편승해 남한측 사업자들의 등을 치기도 한다는 의외의 사실을 그 때 알았다.

 

▲ 오기현 SBS PD
남한에서는 사극의 대가로서 여러 가지 업적을 기록한 김재형PD. 그는 북한의 최고지도자로부터 신뢰와 찬사를 받은 남한의 PD이자, 분단의 장애를 극복하고 남북한의 교류와 문화통합을 위해 마지막 까지 헌신했던 大PD였다. 협력과 평화보다는 대립과 분쟁의 그들이 짙게 드리워진 한반도, 10년 전 노구를 이끌고 남북합작드라마의 꿈을 이루려했던 김재형PD의 열정이 더욱 그립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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