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당신들의 공중파 방송
상태바
[PD의 눈] 당신들의 공중파 방송
  • 김종우 MBC PD
  • 승인 2011.04.20 14: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종우 MBC PD

취업준비생들을 찍었을 당시, 출국을 앞둔 ‘백수 청년’을 만난 적이 있다. 여러 번 최종 문턱까지 갔다가 떨어져 낙담해 한국에서 취업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간다고, 캥거루 뛰는 신대륙에서 영어도 배우고 돈도 좀 모으겠다고 했다. 무엇으로? 육가공업체에서 하루 종일 돼지, 배를 가르며. 가족도 친구도 찾지 않은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을 함께 보냈다. 결국 방송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자기를 찍은 부분은 CD로 구워 보내달라고 부탁하고는 아무도 배웅하지 않는 공항에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오래 알던 사람들처럼 출국카운터에서 헤어졌다. 다니엘 헤니가 나오는 스테이크 광고를 볼 때 불현듯 궁금해진다. 잘 지낼까?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를 찍던 때, 두 마디마다 까르르 웃던 명랑한 아기 엄마가 툭 던지던 말.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노동자만 안 시켜도 성공이지 뭐. 애들 노동자만 안 시켜도 성공이래요” 다니던 학원을 끊어 다 큰 딸 아이가 세살배기들과 같이 그네를 타던 놀이터에서 인터뷰했다. 장미가 환하게 피어 카메라 색감이 아주 좋았다. 노동자니 뭐니 하는 구호들은 들리지 않았다. ‘노동자’를 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 확실한 것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일은 세상을 공부하는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속내를 술술 이야기하는 순간은 마법 같다. 아직도 친구들은 방송사에서 일한다고 하면 연예인 누구를 아냐고 물어본다. 연예인도 모르고 어떤 화려함도 없는 이 직업(교양PD)은 다만 유령처럼, 무수히 많은 가장 보통의 사람들과 만나 아무렇지도 않은 얘기들을 듣는 특권만 있었다. 쿨하고 보기 좋은 사람들과 점점 멀어지며 작고 비천한 사람들과 친해지는 일. 그러니 기본적으로 TV적이지 않은 일을 TV를 통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좋아하는 시인의 고백이다. PD들은 저 시인이 정치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 사이에서 고민하듯이 태생적으로 분열한다. 우리는 투사가 아니다. 우리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쩍벌춤 논란으로 한없이 클릭수만 유도할 수도 없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말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멸종될 거라는 느낌이 든다. 아무도 껄끄럽게 하지 않는 최소 수준의 메시지만 남고 우린 사라질 것이다. 회사는 언제나 군식구 보듯이 우릴 바라본다. 유재석도 박미선도 없이 세상에 뭔가 말하겠다고 까지 하니, 이런 만만한 프로그램들을 모욕하는 것은 경영진 입장에서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 이제 공중파는 시청자들에게 커밍아웃할 때가 되었다. 먹고 살기 힘들며, 우리에게 괴로운 공영성을 원하지 말라고.

 

▲ 김종우 MBC PD

 

tvN에서도 토론도 하고 시사프로그램도 한다. 다만 구색을 맞춰서 만둣국에 올린 김 쪼가리처럼 한다. 그렇게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오직 반듯하고 카메라 친화적인 사람들만을 몇 대의 카메라로 인터뷰하며, 진심을 담아냈다고 홍보안을 쓰자. 당신들을 속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