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특집1 여행가 김효형이 권하는 피서지 주변 문화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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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특집1 여행가 김효형이 권하는 피서지 주변 문화유적지
강진 가는 길엔 불회사 돌장승, 월악산행엔 미륵리 절터, 문경새재 길엔 상주 대산루 …
독특한 장승·잘생긴 석불·시원한 입지 직접 가서 보는 것이 바로 재충전
  • 승인 1997.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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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프로듀서연합회보는 여름휴가철을 맞이해 피서지 주변 문화탐방, 볼 만한 비디오, 읽을 만한 책 등 3개 특집면을 마련했다. 첫 번째 피서지 주변 문화탐방은 국내 유명 피서지 주변에 묻혀 있는 문화 유적지를 소개함으로써 pd들의 휴가철 여행길을 좀더 알차게 해보자는 취지다. 모처럼 마련한 가족들과의 여행에 회사일을 떠올리게 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이 프로그램 아이템으로 직결되는 직업을 가진 바에야 여행길에서도 좋은 아이디어를 얻어올 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특히 우리의 문화유산·유적에 관심이 많은 pd들은 오가는 여행길에 잠시 들러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편집자>
|contsmark1|김효형<한국문화유산답사회 총무>
|contsmark2|전남 나주 운흥사·불회사 장승마을이나 절 어귀의 길 양쪽에 그야말로 ‘장승’처럼 우직하게 서서, 풍년이 들게 해주고 아들을 낳게 해주고 돌림병도 쫓아주곤 하였던 장승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민중의 정서를 담은 또는 파격적인 조형미를 갖춘 미술품으로서 근래 그 가치를 인정받으면서부터이다. 장승은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전국에 고르게 분포한 편이며, 전라도와 같이 평야가 넓어 경제력이 있었던 고장에서는 돌장승을, 충청도나 경기도처럼 상대적으로 산이 많고 농토가 적은 지역에서는 대부분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나무로 장승을 만들어 세웠다. 그 중 언제 보아도 다정하고 따뜻한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를 닮은 나주의 불회사, 운흥사 장승은 전라도 장승의 ‘백미’로 꼽힌다.불회사 돌장승은 운치있는 측백나무 숲길로 열리는 절집 어귀에서 방문객을 반갑게 맞는다. 방학을 맞아 다니러오는 손주, 손녀를 마중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할아버지 장승의 돋보기를 낀 듯 동글게 튀어나온 커다란 두 눈, 무섭게 찌푸린 미간, 꾹 다문 입 사이로 송곳니가 삐죽 튀어나오고 휘날리듯 길게 땋아 왼쪽으로 늘어뜨린 모습이 독특하다. 마주보고 서 있는 할머니 장승 역시 미간을 찌푸렸어도 입가에는 인자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불회사는 돌장승과 함께 화려한 다포집인 대웅전 등 절집 구경을 하는 맛도 조촐하다. 반면 운흥사는 신라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라지만, 절은 간 데 없고 절터 앞 2km 쯤에 돌장승만 남아 있다. 이는 다 빠져버리고 쑥스러운 듯 입만 오물오물대며 웃는 할아버지 장승이나 듬성듬성한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뭔가 재미나 못참겠다는 듯 표정짓는 할머니 장승 둘 다 재미있다. 특히 할머니 장승의 몸통 뒷면에는 숙종 45년(1719)에 세웠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돌장승들의 제작 연대를 짐작하는 데 요긴한 단서가 되고 있다.
|contsmark3|경북 달성 도동서원동방 5현이라 하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를 일컫는다. 그 중 한 사람이 한훤당 김굉필(1454-1504). 도동서원에서 모시고 있는 유학자이다. 도동서원은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5대 서원의 하나로 꼽히고 있지만, 다른 서원들에 견주어 요즘 사람들에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의 도동(道東)이라는 이름에는 당시 조선 사람들의 유학적 성취와 정통성 계승에 대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으며, 또한 서원 건축이 가져야 할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건축적 규범을 완벽히 갖춘 서원으로도 꼽을 수 있다. 대문에 해당하는 수월루를 지나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설 수 있도록 설계된 작고 겸손한 환주문이 나선다. 환주문을 들어서면 서원의 중심 영역인 배움의 공간.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양 옆에 서고 중심엔 강의실에 해당하는 중정당이 있다. 중정당은 유학자의 흔들림 없는 기품을 담은 양 의젓하고 당당하다. 중정당이 자리한 높직한 기단은 크기가 각기 다른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는데, 마치 면 분할이 뛰어난 조각보를 보는 듯 정교하다. 중정당 뒤로 돌아가면 제사 공간인 사당. 지형적으로 가파른 비탈에 여러 단의 석축을 쌓고 석축이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갖가지 꽃나무를 심었으며, 그 사이로 계단을 내어 연결하였는데, 자칫 가파르고 삭막할 뻔한 이음 공간을 퍽 정감있게 가꾸었다. 도동서원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보아야 할 곳은 담장이다. 진흙을 섞어가며 막돌을 몇 줄 쌓은 뒤 황토 한 겹, 암기와 한 줄을 되풀이하여 쌓다가 기와를 덮어 마무리했는데, 벽면 중간 중간에 수막새를 박아 율동감을 주었다. 이런 담장이 지형에 따라 높낮이가 바뀌고 꺾이며 만들어내는 변화가 퍽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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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충북 월악산 미륵리 절터영남이라고 하면 조령(문경새재)의 남쪽 지방을 일컫는데, 이는 조령이 이를 경계로 한 두 지방 곧, 호서와 영남의 문화, 생활, 경제를 가를 만큼 큰 분수령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분수령이란 말은 반대로 생각하면 두 지방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요 교통로를 뜻하기도 한다. 조선 초기부터 한말까지도 영남의 관문으로 인정받을 만큼 중요한 교통로였던 조령이지만, 1925년 일제가 이화령에 신작로를 뚫은 이후로는 점차 그 기능이 약해져 지금은 한낱 관광지가 되어버렸다. 계립령(충주 미륵리-문경 관음리) 역시 지금은 비록 좁은 등산로에 불과하지만, 조령이 뚫리기 전인 삼국시대 이래 고려 말까지 삼국의 경계로 중요한 군사적 요지이자 호서와 영남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어왔다. 이곳 계립령 길목에 고려 초기에 지어진 대찰 미륵리 절터가 있다. 절터 가장 안쪽에 환한 낯빛의 잘 생긴 석불 입상(보물 제96호)을 기준으로 앞쪽에 팔각 석등과 오층 석탑이 줄을 섰고, 드문드문 사각 석등과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돌거북 모양의 비석받침, 비록 쓰러진 채이지만 연꽃 문양이 도드라지게 조각된 당간지주, 연화좌대도 보인다. 절터 인근에서 군사 시설의 흔적으로 보여지는 건물터와 유적들이 다수 발견되어, 고려말까지도 중요한 교통로였던 이곳 계립령 길목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했을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길목을 지키는 국방상 요지로서 기능했을 미륵리 절터의 입지를 짐작해볼 수있다. 그러나 미륵리 절터는 문헌상 절 이름이나 역사가 분명치 않다. 절터에 전하는 이야기로 신라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일행이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에 입산하던 중 이곳에 들러 석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 미륵리 절터가 주목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석불 주위에 남아 있는 ㄷ자형 석벽 때문이다. 석불 주위에 ㄷ자형 감실을 만들고 그 위에 목재로 전각을 씌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경주 석굴암의 돔형과는 다른 방식이나 근본적으로는 석굴암을 모방하여 만든 석굴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석벽 감실에는 여래좌상과 원형이 불분명한 보살들이 앉아 있다.
|contsmark6|경기 수원 화성화성이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고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왕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 장인들의 역량이 총동원되어, 전통적인 조선 성곽과 중국 그리고 유럽 성곽의 장단점까지 고려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상적인 축성술을 시도해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성곽이 보통 읍성 아니면 산성인 반면 화성은 팔달산을 끼고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축성된 산성과 평지성의 복합체이다. 또한 다른 성곽에서는 보기 힘든 공심돈(망루의 역할과 함께 총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렸다) 같은 방어 시설이 도입되었고, 전시에는 적군 감시와 지휘소 기능을 하면서도 평시에는 휴식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화수류정도 만들어졌다. 축성 과정에 있어서도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개념이 시도되었다. 작업 과정에서 인부들이 일정한 작업량에 따라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작업 능률을 올렸고, 자재를 운반하는 새로운 수레와 거중기라는 돌을 들어올리는 첨단 기계까지 고안해냈다. 뿐만 아니라 성곽 공사가 마무리된 직후 화성 축성 공사의 전말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자로 기록되었다. 그때 그때 현장의 일이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졌기에,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훼손되었음에도 화성은 1975년부터 약 4년 동안 본래 모습대로 거의 완벽하게 재현될 수 있었다. 비록 완공 11년만에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더불어 목표했던 바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한낱 지방 성곽의 하나로 주저앉게 되었지만, 화성에 드러난 발달된 축성 방법과 정신은 오늘날에 이르러 인류의 문화 유산으로 인정받아 올해말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등록될 예정이다.
|contsmark7|경북 상주 대산루상주 지역 옛건물들의 특징이라면 우리나라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2층집 선호 경향을 들 수 있다. 특히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는 대산루는 1층집과 2층집을 완벽하게 결합한 예로 손꼽힌다. 대산루는 18세기 후반, 우복 정경세의 6대손인 정종로(1738-1816)에 의해 지어졌다. 상주 출신인 우복 정경세(1563-1633)는 이황에서 유성룡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수제자로, 당대에 영향력이 적지 않았던 학자요 정치가. 중년 이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조그만 정자와 살림집을 짓고 은거하며 지냈는데, 정경세가 죽은 지 1세기 후 영조는 그의 연고지를 후손에게 하사하였다. 대산루를 비롯하여 계정, 우복 종가, 도존당(우산서원)이 있는 지금의 우산동천이 그것이다. 대산루는 단층의 건물과 2층 누각을 직각으로 연결한 t자형 건물. 단층 건물은 4칸짜리 강학 공간이고, 2층 누각은 휴식과 손님 접대 그리고 장서와 독서를 위한 복합 용도의 공간이다. 두 건물은 내부 계단으로 연결되어 완벽한 하나의 건물로 통합돼 있다. 민간 건축으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것이다. 대산루에서 일차로 눈여겨 볼 곳은 2층에 있는 한 칸의 온돌방. 네 벽 모두에 문과 창이 달려 있어 2층을 드나드는 유일한 통로가 되는 동시에 주변 경관을 흔쾌히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높은 누마루에 구들을 놓고 불을 지펴 난방을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기술이 아닐 수 없는데, 이를 원만히 해결하고 있다. 단층 건물과 2층 누각을 연결하는 돌계단 역시 대산루만의 독특한 표정이다. 툇마루 끝에 놓여진 돌계단이 어색하지 않고, 건물의 일부로 녹아드는 것은 돌계단 바깥으로 작은 담을 쌓아 계단을 내부 공간화했기 때문이다. 계단의 바깥 벽은 ‘工’자가 아담하게 수놓인 꽃담이다. ‘산을 대하는 곳’이라는 이름처럼 가까이 있는 계류와 가까운 평야, 먼 산을 시원하게 바라보는 입지도 매우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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