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우리들 가슴에 남아있던 빚 때문이었다.
800회.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을 쉼 없이 달려온 〈그것이 알고 싶다〉에 우린 스스로 약간의 칭찬을 해줄 수도 있었다. 20년 동안의 성과를 보여주고 프로그램에 나와 도움을 받았던 분들의 후일담을 방송하고, ‘그것이 알고 싶다가 시사 프로그램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식의 전문가 인터뷰를 붙여서 그간의 세월을 회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800회를 맞아 모인 우리 제작진 누구도 쉽게 그러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건 우리들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아 있는 빚 때문이었다. 1992년 3월 〈그것이 알고 싶다〉 첫 방송에 소개된 고(故) 이형호 군. 우린 그때 형호에게 약속했다. 너의 행복한 삶을 끝낸 놈을, 9살 짧은 생을 공포 속에 마치게 한 그 나쁜 놈을 꼭 법의 심판대에 올리겠다고…….
그 약속은 20년 동안 지켜지지 못했다. 그것은 누구도 겉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선배들을 통해 이심전심으로 전해져온 부채였다. 또 다시 그를 정의의 심판대에 올리지 못할지 몰라도 형호에게 다짐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린 빛바랜 자료집을 다시 꺼내고 20년 전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무모한 도전은 시작됐다.
공소시효도 지나 이제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건. 죄 없는 원혼들은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데 살인마들은 버젓이 백주대로를 활보하고 있는 사건들. 우린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아직도 이 사건들은 끝난 게 아니라고, 죗값도 치루지 않은 채 우리 이웃으로 살아갈 살인마들이 잡히지 않는 한 이 사건들은 끝난 게 아니라고, 그렇게 되지 않는 한 화성에서, 대구 와룡산에서, 압구정동 놀이터에서 사라져간 이들의 영혼은 편히 잠들지 않을 것이라고.
우린 미치도록 그 범인들을 잡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프로그램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을 다시 뒤쫓아 가기로 했다. 90년대의 범인들을 21세기의 과학 수사 기법으로 뒤쫓아 보자. 그간의 모든 가설을 잊고 냉정하게 분석하고 철저하게 검증을 해보자.
그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경우 용의자가 이전에 이 지역에서 연쇄 강간을 저질렀다는 결정적인 문서를 발굴하고 거기에 나온 인상착의를 기초로 새롭게 몽타주를 만들었다.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은 아이들을 처참히 죽이는데 사용한 살인 무기가 무엇인지 찾아냈고 범인의 성격까지 프로파일링 해냈다. 형호를 유괴한 주범은 전화기 건너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전화를 건 그 놈 목소리는 단지 하수인의 목소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남아있는 46개의 음성파일을 분석해서 새로 밝혀냈다.
그러나 새롭게 찾은 증거와 단서 역시 아직은 미완성의 것이다. 우리가 찾아낸 것들은 단지 새로운 수사를 시작할 수 있는 단초일 뿐이다. 우리가 밝혀낸 새로운 단서를 바탕으로 처음부터 치밀한 수사가 이뤄진다면 범인은 꼭 잡힐 수 있을 것이라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이제는 공소 시효가 끝나 새롭게 수사를 시작할 주체가 없다. 끝이 보이지 않고 성과도 나오지 않을 것 같고 무엇보다 범인을 잡아도 처벌할 수 없는 미제 사건에 투입할 공권력은 없어 보인다.
형호와의 약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와룡산에서 숨져간 5명 소년과의 약속도, 화성에서 처참하게 생을 마감한 누군가의 딸, 엄마, 아내였을 희생자들과의 약속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록 그 살인마들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지 못하더라도, 또 다른 형호, 또 다른 개구리 소년, 또 다른 누군가가 단지 세월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왜 누구에게 죽어야 했는지 모른 체 잊혀서는 안 된다. 〈그것이 알고 싶다〉와 형호와의 새로운 약속은 2011년 그렇게 다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