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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내가 작년에 인터넷방송인 칼라TV에서 진행했던 인터뷰, “정태인의 호시탐탐”은 삼성 특집을 했다. 당연히 삼성 반도체의 백혈병 관련자들도 여러 번 출연했는데 이 인터뷰는 짧은 질문 한 두 개로 끝냈다. “정애정에게 황민웅은?” 정애정씨는 2006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민웅씨의 부인이다. 한 시간이 넘는 인터뷰에서 줄곧 밝고 씩씩하게 대답하던 정씨가 이 마지막 질문에 갑자기 고개 숙여 눈물을 뚝 흘리며 한 답은 이랬다. “제 모든 거요.”

지난 23일 서울행정법원 행정 14부(부장판사 진창수)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등 8명이 제기한 소송에서 이 중 일부가 앓은 병과 삼성의 업무 사이에 인관관계가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현재 투병 중인 다른 직원 2명과 유족 1명에 대해서는 “유해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피해를 입었다고 보기 어렵고 일부 영향을 받았더라도 백혈병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볼 수 없다”고 판시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다 장악하다시피한 삼성에 맞서 피해자 가족들과 ‘반올림’의 거둔 승리였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볼 때 너무나 뻔한 산업재해의 보험금을 받기가 이리도 어려운 것이 과연 정상적인 사회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삼성은 영업기밀이라는 이유로 반도체 공정에 사용된 화학물질도 밝히지 않았고, 재판에서 원고들 스스로 그 물질의 존재를 제시하고 병과의 인관관계까지 입증해야 한다니 이건 지극히 불공정한 게임이다.

▲ <경향신문> 6월 24일 12면
미국 역시 그랬다고 위안을 삼지 말라. 우여곡절을 겪은 후 캘리포니아에서는 전자공장에서 사용하는 위험물질을 지역사회에 알리는 데까지는 나아갔다. 반도체 산업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반도체 공정에서 유독물질을 사용하며 실리콘밸리를 필두로 전 세계에서 유사한 사고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1980년대가 지나면서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 기흥공장, 또는 온양공장 제 몇 라인에서 무슨 화학물질을 사용했는지를 안다는 건 제 아무리 전문가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법원이 삼성의 당시 작업일지나 화학약품 구입 목록만 제출하라고 했어도 해결될 문제이다.

남편이 남긴 두 아이를 키우는 일만으로도 허리가 휠 정도면서도 서울을 오르내리며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주위를 환하게 만들던 정애정씨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기쁨의 눈물이에요. 이것만 해도 큰 성과예요. 여태껏 싸워온 게 조금이나마 보상 받는 느낌이에요. 기쁩니다”

삼성은 삼성전자는 이날 판결 후 보도자료를 통해 “반도체 사업장의 근무환경과 관련해 공인된 국가기관의 2차례 역학조사 결과와 다른 판결”이라며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역학조사에 피해자와 가족은 들어갈 수 없었다. 삼성은 아마 더 그럴듯한 자료도 제출할 것이다. “권위있는 해외 제3의 연구기관에 의해 실시된 반도체 근무환경 재조사 결과를 다음달 중으로 공개할 예정”이라니 말이다.

 

무슨 굉장한 걸 원하는 게 아니다. 앞의 두 역학조사와 새로운 재조사 원본과 원자료를 모두 법원에 제출해서 제3의 전문가들이 검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 “삼성전자는 언제나 임직원의 건강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있다”는 주장을 깨알만큼이라도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소 원장
여기 입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청춘의 한 토막을 기꺼이 삼성에 바쳤고, 또 거기서 결혼하고 애까지 낳았지만 졸지에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이 있다. 그리고 비슷한 환경에서 일했던 노동자 중 불치병으로 이미 사망한 사람만 무려 46명이다.

 

유족들의 절절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공감한다면 이미 기밀로서의 가치는 하나도 없을(반도체 산업은 가장 기술발전 속도가 빠른 분야이다) 화학약품 목록과 당시 장비 목록을 내놓는 게 그리도 어려운가. “휴먼 삼성”과 “인간에 대한 예의”는 단 한치의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은 걸까? 삼성이 사람에겐 눈물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과연 알기는 아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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