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따져보기] 드라마가 하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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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따져보기] 드라마가 하는 거짓말
  • 윤정주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소장
  • 승인 2011.06.29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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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공아정(윤은혜)
MBC <미스 리플리>의 장미리(이다해)

여기 두 여자가 있다. 한 여자는 일본에 입양돼 자랐으며 술집에서 일했다. 그러나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생활이 너무 지긋지긋해 도망쳐 한국에 오지만 한국에서도 취업이 녹록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호텔 총지배인을 만나게 되고 자신이 동경대를 나왔다고 거짓말을 해 호텔에 취직한다. 

또 다른 여자는 첫사랑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행정고시를 준비한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날 남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려하지만 이미 그는 친구와 연인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부부가 된 두 사람을 미용실에서 우연히 만나고 그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결혼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 SBS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공아정(윤은혜)

두 여자는 현재 월화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전자는 MBC <미스 리플리>의 장미리(이다해)이고 후자는 SBS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공아정(윤은혜)이다. 두 드라마의 공통점은 ‘거짓말’이다. 거짓말로 관계를 시작하고 거짓말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두 드라마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바로 두 여자가 ‘왜 거짓말을 시작하게 되었나’다.

<미스 리플리>의 장미리는 먹고 살기 위해,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 탄로 나는 순간 그녀는 바로 일본으로 추방되어 다시 술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공아정은 첫사랑 남자와 그를 빼앗아간 자신의 친구에게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생판모르는 남자까지 끌어들여 자신이 결혼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즉, 한 사람은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그저 자존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면서까지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 장미리의 거짓말은 보는 내내 안타깝지만 공아정의 거짓말은 공감하기 힘들다.

심지어 드라마 초반에 공아정은 이제 겨우 28살의 잘나가는 문화체육관광부 5급 공무원이지만 결혼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구에게 굴욕을 당하고 인생 다 산 것처럼 대성통곡 한다. 그리고 잘나가는 젊은 재벌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거짓말 이후에야 비로소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부러움까지 산다. 이는 바로 여성의 능력은 공적 영역에서 그녀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결혼 여부와 누구와 결혼을 했는지 등 아주 사적인 영역에서 결정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MBC <미스 리플리>의 장미리(이다해)

그러나 이미 우리 사회에서 긍정적인 의미의 ‘골드 미스’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어 쓰이고 있고, 직업을 갖는 것은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다. 그런데도 드라마는 여성의 행복과 가치는 무엇보다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라는 시대를 역행하는 사고방식을 아무 비판 없이 그대로 보여주기만 한다. 드라마가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일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찬물을 끼얹고 ‘여성의 행복=결혼’ 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이제 드라마는 결말로 치닫고 있다. 결혼을 했다는 거짓말을 자신의 친구들이 믿을 수 있게 그동안 공무원 신분을 망각한 채 근무시간에도 개인 볼일 보러 다니던 공아정이 종방을 하루 남겨둔 이 시점에서 갑자기 자아가 찾아온 듯 자신의 일을 지키고자 재벌 남성과의 결혼을 포기할 기세다.

하지만 공적 일이든 사적 일이든 자신의 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드라마 속 공아정처럼 다른데 정신이 팔려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가 갑자기 지키고 싶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뻔한 거짓말 속에도 이러한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에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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