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야 꽃은 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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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야 꽃은 피는가?
[제작기]EBS ‘세계의 아이들’ 파키스탄 난민촌 취재한 김평진 PD
  • 김평진 EBS PD
  • 승인 2011.08.1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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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세계의 아이들> ⓒEBS
김평진 EBS PD

어이없다 못해 화가 난다. 무슨 ×의 나라가 이 모양으로 생겨먹었을까? 14일 간의 짧은 취재 기간 동안 우리는 세 번의 테러를 만났다. 물론 적지 않은 사람이 죽어나갔고, 더 많은 사람이 다쳤다. 잘린 머리들이 흩어져 널리고 주인 잃은 팔다리들은 어지럽게 나뒹군다.

참혹하다. 하지만 그 시각 텔레비전은 서너 명이 둘러앉아 시답잖은 주제를 놓고 벌이는 열띤 논쟁이나 크리켓 경기 중계로 태평하고, 다음날 신문에서도 구석구석을 헤매다 서너 줄 짜리 단신으로 처리된 기사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참혹한 테러조차도 텔레비전의 속보 거리가 되지 못하고 신문의 헤드라인을 차지하지 못하는 ‘나라’라니? 죽임과 죽음은 이들에게 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된 지 오래다.

회사는 우리더러 이곳으로 가서 ‘꿈’을 찍어오라고 한다. 참, 어이없어…. ‘이곳에서도 꿈이 자라고 있다’는 얘기를 하라고? 그건 나 자신조차도 설득시킬 수 없는 기만(혹은 조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현실에 충실해 절망만을 테이프에 담아온다면 도대체 비싼 돈 들여 그런 얘길 하러 그 곳엘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 EBS <세계의 아이들> ⓒEBS

진퇴양난! 저녁노을은 부자의 저택뿐만 아니라 난민촌의 비닐 덧댄 창문도 붉게 물들이고, 하루가 멀다 하고 불벼락 터지는 지옥의 한 구석에서도 애 낳고 장사하고, 그렇게 삶이 이어지고 있으니 얘기가 없겠나마는 ‘꿈’이어야 한다고 했다.

‘총을 든 아이들’ 소년병 얘기를 하고 싶었다. 사람 냄새는 분명 화약 냄새보다 진할 거라 믿자. 이 아이들이 쥐고 있는 AK-47의 총구를 통해 죽이고 죽는 분쟁의 신음 소리보다는 살리고 사는 삶을 그려볼 수 있겠다.
‘살기 위해’ 총을 잡은 아이들 기특한 생각이다. 허나, 이 의도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는지 판명되기까지는 현지 코디를 만나고서 3분 이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공부는 하고 파키스탄에 온 건가?’하는 표정. 미군의 드론(무인 폭격기)은 주로 우리 같은 외국 방송국이 촬영한 화면을 통해 탈레반의 위치를 파악해서 폭탄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그들 근거지를 촬영한다는 것은 ‘나를 조준 사격 표적지(標的紙)로 삼으쇼.’하는 거라나?

한 달여의 준비 끝 모습치곤 허망하다. 물론 해외 촬영은 늘 이 모양이다. 현지 상황과 달라도 너무 달라 작가가 던져주는 서넛 쪽 짜리 구성안이 기능을 발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지의 상황에 대한 불안함을 덜어주는 진정제이거나 급할 때 쓸 수 있는 이면지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한다.

그래왔듯 이제부터는 맨땅에 헤딩이다. 차라리 이렇게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 깔끔하다. 그러면 대안을 찾기가 훨씬 쉬워지니까. ‘나에게는 아직 난민촌이 남아있지 않은가?’ 그래. 샤알름 마르카스 캠프로 가자. 이곳은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어진 대량 학살을 피해 도망 온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1980년에 만들어진 난민촌이다.

‘간다라 미술’의 발상지이자, 자살 폭탄 테러의 온상으로 잘 알려진 파키스탄 북서부 페샤와르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선 두 개의 그림자가 없으면 유령이다. 하나는 내 그림자, 다른 하나는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호원. 나는 두 가족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짜나갔다. 첫 번째 사례는 한때 이슬람의 표식처럼 인식돼왔던 일부다처 가족인데, 부인들은 28살과 22살이다. 우리 돈으로 60만 원 정도인 지참금 중 절반 정도를 마련한 카빌 씨는 내년 쯤 세 번째 부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13명이다.

▲ 김평진 EBS PD
두 번째는 이 난민촌 최초 정착 가족으로, 4형제가 모여 사는데 아이들만 60명이다. 이 아이들은 크리켓 경기를 할 때, 형제들만으로 2개의 선수단을 만들고 남은 아이들로는 응원단과 구경꾼까지 꾸릴 수 있는 환상적 규모와 시스템을 자랑한다.

어른들은 아프가니스탄과 무역을 하는데, 오사마 빈 라덴 사망 후 불안정한 국경 사정으로 거래 길이 막혀 지금은 쫄쫄 굶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이들과 10여일을 같이 먹고 자며, 때론 함께 웃고 때론 같이 울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프로그램은 ‘그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나’에 대한 기록이다.

허용된 지면에 풀어놓을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다. ‘꿈’을 보기는 했냐고? 물론이다. 꿈만으로 살 수는 없지만, 꿈이 없이는 더더욱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살림이니, 어딘들 꿈이 없겠는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PD가 PD이겠는가? 그 얘기는 ‘프로그램’으로 말했으니, 지켜봐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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