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지금 박주영이 중요한 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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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웬만하면 꼼수를 부려서라도 영국축구리그(EPL)를 봐요. 맥주도 한 캔 걸쳐주면 좋죠. 한동안 박지성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를 좋아했고 애국심으로 EPL에 입문했는데, 정이 들어버렸던 팀은 다름 아닌 ‘아스날’이었어요. ‘빅 4’ 중의 하나. 맞아요, 이번에 박주영이 이적했으나 여태 출전을 안 시키며 애꿎은 맥주와 치킨만 축내고 있는 얄미운 팀.

8월 말, 맨유와의 원정경기에선 8대2로 졌어요. 지난주 경기에선, 지난해 강등권을 가까스로 면했던 블랙번에게도 자책골을 두 골이나 넣으면서 덜미를 잡혔죠. 질 것 같더라고요. 불안했죠.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과 각종 SNS에서는 ‘이번 시즌 포기하고 내년을 준비해야 한다’, ‘감독님 타월 던져요’라는 비방이 난무해요. 초반 분위기는 빅4 자퇴하고 ‘강등권 배틀’ 준비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해요. 8골을 넣었던 맨유가 무너뜨린 건, 단순히 아스날이 가져갔어야 할 승점 3점의 기회가 아니었거든요. ‘메이드 인 아스날’의 유스(youth)를 키워 승리하겠다는 이 팀의 철학과 기조 자체가 흔들리는 분위기인거죠.

언제부턴가 이 팀은 ‘뷰티풀 사커’의 상징이 되죠. 이는 1996년부터 팀을 이끌고 있는 아르센 벵거 감독의 영향이 커요. 지는 게임을 하더라도 10분만이라도 아름다운 축구를 하겠다는 철학으로 무장해 있고, 축구가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스포츠'라는 점을 확실히 인식해 ‘문화적-인종적 문제의 최전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책임’을 강조하는 남자라죠.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 팀을 배신할 수 없어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직을 거절한 그는 진정한 ‘쿨가이’의 원형일지도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평가도 들립디다. 거액의 이적료를 들여 베테랑을 영입하는 대신, 유소년 정책을 계획하고 연구해서 ‘뼛속까지 아스날’인 선수들을 키우죠. 세스크 파브레가스, 가엘 클리시 같은 친구들을요.

 그러나 EPL의 흐름은 그게 아니지 않던가요.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요. 첼시가 리버풀에서 토레스를 영입한 이적료가 역대 최고인데, 5000만 파운드였죠. 대략 한화로 900억 원. 그러나 아스날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 중 이적료가 가장 높았던 선수는, 러시아에서 데려온 ‘꼬맹이’ 아르샤빈. 불과(?) 1500만 파운드거든요.

출발이 좋은 맨유와 첼시는 잘 나갈 거예요. 리버풀도 작년의 부진을 씻으려 대략 6천만 파운드를 들여 캐롤과 수아레즈를 영입했고, 결과는 나쁘지 않죠. 중동 부호 구단주의 오일머니로 수년간 돈-X랄을 했던 맨체스터 시티는 현재 4전 4승. 작년 4위였던 아스날만 죽을 쑤고 있네요. 그래도 ‘강등권 드립’ 따위는 우뇌 한 구석에 고이 접어두고 응원할까 해요. 이겼으면 좋겠어요.

 

▲ 김규형 SBS 교양 PD

 

반드시 비싼 돈 들여서 좋은 선수 많이 영입했다고 우아한 게임을 하며 항상 승리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이 보기 좋게 틀렸음을 입증해 주었으면 좋겠거든요. 경제논리로 영입된, 슈퍼스타 클래스로 이뤄진 스쿼드도, 처절한 팀에 의해 무너질 수 있음이 항상, 혹은 꾸준히, 최소한 가끔은 증명되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나저나, 거액의 계약금을 받는 PD들이 몰리는 종합편성 채널은 잘 되겠죠,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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