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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꿈꾸는 자유를 훔쳐보고 있노라면
김종철

|contsmark0|꿈과 자유는 일반적으로 동질성을 지닌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현실에 있어서 꿈을 키워나갈 때에는 자유로움이 줄어들고, 게으름을 피울 만큼 자유를 만끽할 때에는 손톱 만한 공간의 꿈도 주어지지 않는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자유의 들판 너머로 꿈은 나비처럼 오색 무지개로 날개짓하고 있음을 그대, pd로 이름 불려지는 그대들은 아는가.연극무대에서 만들어진 ‘리허설’이란 용어가 tv매체에서도 아무런 생소함 없이 받아들여 사용되는 것에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대는 이미 pd가 아니다. 우리가 배운 역사속에서 시민사회를 형성하였던 근대 초기에, 일반 시민들은 정보의 부족에 늘 불안을 느껴왔으며 절대권력의 창가에 신문이라는 활자매체를 이용하여 비판적 여론의 돌을 던지는 소모적인 행동을 통하여 공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어리석을 만큼 무모했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민혁명과 시민사회가 이루어졌고 전제권력은 무너졌다. 시민들은 착취나 사기, 오해가 없는 넓고 환한 대낮에 자신들이 스스로 꿈을 꾸며 세상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외없이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로 지배당하고 있고 세상은 정보로 흘러 넘치고 있는데 단지 이를 수용하려는 사람들의 능력이 따라가지 못할 뿐이다. 방송이나 신문 등 미디어를 통한 새로운 정보들의 유통이 무책임한 권력을 파괴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공정(公正)과 공영(公營)이라는 잣대의 정보들조차 정의(正義)의 바다에 흘러든 물방울이거나 탁류로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잠자듯 피어나는 설화(雪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1세기를 4년 남짓 남겨둔 우리의 사회는 분명 ‘고도 정보화사회’가 분명한데 정보의 늪 속으로 빠져든 사람들은 정보 그 자체를 소화하고 제대로 인지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정보의 바다에 갇히게 된 것이다.사설이 길고 지루하였지만 이야기하려는 내용은 너무나 간단하다. 불과 2, 3년 방송제작 현장에서 겪은 격심한 변화 중 하나로 ‘고민하는 pd’가 줄었다는 것이다. 세태를 반영이라도 하듯 드라마, 쇼, 코미디는 애시당초 기대할 것이 없던 장르였지만 시사정보, 교양, 다큐멘터리 등 방송정보의 백미에 해당하는 부분에 이르기까지 시청률이라는 시장경제 원칙에 내몰린 말초적인 이야기이거나 “정부의 권력이나 돈의 권력에 좌우되지 않을 때 언론은 자유롭다”고 말한 알버트 카무스의 ‘탈 규제 언론’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너무 가혹한 질문인가? pd가 고민하지 않는 정보는 빨래터 여인네들의 한담이거나 시장바닥의 욕지기거나 술집에서 털어놓는 웃음과 같이 하루 해를 넘기지 못한다는 속발성, 단편성, 호기성, 엽색성의 이야기일 뿐이다. 정보의 가치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대중매체에 있어서 pd와 기자는 엄연히 다른 영역을 소유하고 있다.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기자가 사건을 전개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면 pd는 시민사회를 위하여 사실을 조립하고 역으로 구성하는 기능을 발휘하여야 한다. 새로운 정보에도 어둡고 세상 변화에 귀찮아하면서 프로그램을 선택하려고 호기를 부린다면 그대는 실패자다.그대, pd들이 고민하지 않는 단편적인 이야기를 간단히 옮겨 적어보면 디지털기술에 의한 방송커뮤니케이션의 관심에서 나타난다. 디지털기술은 정보유통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기술에 비하여 경비를 절감시키고 시민사회와 국가간 더 넓게 활용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을 방법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만드는 혁명적인 기술이다. 하지만 실재 적용함에 있어서는 아직 완전한 기술이 될 수 없다. 광섬유(optical-fiber) 채널용량, 램(ram) 용량, 칩의 조밀도와 처리속도 등이 계속 가파르게 개선되고 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디지털기술에 접속하려는 이유는 이 기술이 갖고있는 몇가지의 속성 즉, 모든 종류의 정보(비디오, 음성, 텍스트, 그래픽, 가상현실)들을 디지털화하여 다른 종류의 미디어간 데이터의 호환성을 촉진시키는 것에 있다. 디지털기술은 정보처리과정에서 대량의 운영체제, 장비의 소형화, 처리속도, 에러체크 기능 등이 원거리를 연결하는 이점으로 작용하여 사회구조를 탈중앙적이며, 소규모의 이상적인 집단으로 이용자들에게 유리하게 선택될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지금까지 대중에게 연속적으로 프로그램을 제공하던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전통적인 패턴과는 매우 다르다.자, 이런 문제에 있어서 기자의 신분으로 취재하고 방송을 한다고 하면 내일 이 세상의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지더라도 도입의 정당성을 홍보하여야 한다. pd가 기자인가? pd의 고민은 이 순간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 기술적인 환경, 도입초기에 초래될 산업적인 이해관계를 면밀히 살펴보고 최선의 선택을 시민사회에 제공해야 될 의무와 책임이 그대들에게 짐 지워져 있다. 너무 심한 비약인가? 국가이익이 다반사로 내팽개쳐지는 시대의 pd들의 꿈꾸는 자유를 훔쳐본 나의 오만인가?|contsmar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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