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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 TV적 아이템과의 외로운 싸움

|contsmark0|“5백년전의 성리학자에 대해, 그것도 프라임 타임에 두 시간씩이나 방송을 한다구요? kbs 정말 대단하군요. 미국의 상업방송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데…” 2001년 8월 미국 보스톤 하바드 대학교.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연세대 함재봉 교수와 제작진은 하바드 대학 교수클럽의 세련된 빅토리아풍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contsmark1|우리를 이곳으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한 사람은 하바드 옌칭 연구소의 뚜 웨이밍 소장. 그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의 유학연구자 중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학자이며 퇴계를 미국에 소개한 최초의 인물중 한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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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다큐멘터리로 담아내지 못할 소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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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이 메일을 통한 섭외과정에서 한국의 공영방송에서 퇴계의 철학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다는 사실을 알고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도와주겠노라고 약속했던 투 웨이밍 교수에게 조차도 ‘다큐멘터리 퇴계’는 사실은 非tv적인, 反시청률적인 걱정되는 아이템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contsmark6|그랬다. 애당초 프로그램의 기획과정부터 많은 동료들이 우려를 표명했었다. 지금과 같은 ‘철학 부재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시청자들이 그 옛날 퇴계의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라는 얘기, 과연 퇴계의 복잡하고도 난해한 사상을 얼마나 쉽고 정확하게 영상화 할 수 있겠느냐 라는 걱정, 심지어는 고등학교 윤리수업시간에나 어쩔 수 없이 들여다봤던 理니 氣니 四端七情이니 하는 골치 아픈 개념들, 관념으로 박제되어 있는 그의 가르침이 오늘날의 복잡한 사회에 얼마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에 이르기까지 많은 충고들이 쏟아졌다.
|contsmark7|오기가 생겨났다. 안될 것 같은 프로그램을 한번 해보는 것도 pd로서 좋은 경험자산이 될 수 있겠다는 오기였다. 이 세상에 다큐멘터리로 담아내지 못할 소재는 없다는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contsmark8|퇴계에 관련된 각종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문가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理氣二元論, 理氣一元論, 四端과 七情, 性과 心 그리고 敬. 고등학교 졸업이후 다시 접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바로 그 추상들과의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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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0|난해한 내용과 고급스런 영상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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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2|역부족. 퇴계의 세계는 짧은 시간 짧은 지식으로 파악해 내기에는 너무도 넓고도 깊었다. 퇴계와 같은 대학자가 70평생을 다바쳐 이룩한 학문체계를 이 짧은 시간에 소화해 그것도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시도자체가 과연 정당한 것일까?
|contsmark13|프로그램이 끝난 지금까지도 솔직히 말해 퇴계는 내게서 멀리 있다. 아마 아직도 퇴계라는 거대한 성의 대문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라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노력을 통해 내가 알고있던 퇴계가 아닌 전혀 새로운 모습의 퇴계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작지만 커다란 성취였다.
|contsmark14|퇴계는 갑갑하고 하품 나는 관념론자가 아니었다. 퇴계는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워져도 인간 개개인에게 그 혼란을 바로잡을 능력과 가능성이 있음을 진심으로 믿었던 철학자였고, 그러한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진정한 사회개혁의 알파이며 오메가임을 실천으로 보여줬던 교육자였다.
|contsmark15|프로그램 속에서 굳이 ‘현대세계의 인간들은 사람다움의 본성 즉 四端을 쉽게 잊어버리게 하는 신자유주의, 물질 만능주의라는 七情의 환경에 포위되어 있다’고 어려운 문자를 동원한다면 그것은 퇴계의 이 평범해 보이지만 커다란 가르침을 좀더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위함일 터였다.
|contsmark16|이 프로그램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면 그것은 주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영상의 덕이었다. 사실 난해한 그리고 멀어 보이는 퇴계의 사상과 가르침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현실 가까이로 끌어내 친숙한 톤으로 전달을 할까는 또 하나의 커다란 숙제였다. 그런 면에서 이 프로그램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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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8|허탈감을 뒤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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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0|“퇴계는 너무 어려워”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영상을 담당한 촬영감독, 특수영상제작팀 모두가 좀더 세련되고 친근한 영상으로 프로그램의 난해함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contsmark21|그들보다 뭘 더 좀 아는 것도 아닌 내가 이렇게 저렇게 퇴계의 사유체계를 설명하려 했던 기억들은 민망하면서도 항상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는 좋은 경험이었다. 좀더 공부하고 좀더 철저히 준비해야겠다는…
|contsmark22|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낮은 시청률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더욱 나를 낙담하게 했던 것은 나름대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이 역시 어려웠다는 몇몇 동료들의 평가였다.
|contsmark23|철학이든 무엇이든 tv로 표현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자만은 역시 자만이었을 뿐이었을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 심오한 사유의 세계를 프로그램으로 표현하는 만용을 부려 오히려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그의 큰 뜻을 훼손하는 역기능을 가져온 것은 아닌지…
|contsmark24|매번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느끼는 반성과 허탈감이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조금 심한 것 같다. 인내를 가지고 이 프로그램을 시청했을 시청자들에게 나는 퇴계의 가르침중 하나라도 제대로 남겼을까?
|contsmark25|박정용 kbs 기획제작국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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