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호 PD의 되감기] 사랑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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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호 PD의 되감기] 사랑의 공간
  • 오정호 EBS PD
  • 승인 2011.11.2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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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Brief Encounter> 감독 데이빗 린 (1945, 영국)
오정호 EBS PD

나 혼자만 알고 싶은 좀 알싸한 연애 소설이 몇 개 있다. 적당한 조명과 취기만 받쳐준다면 눌변인 내가 지껄여도 오 분 정도의 이야깃거리는 되지 않을까. 그 중 하나가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윌리엄 트레버(William Trevor)가 쓴 <그들 시대의 연인들>(1978)이라는 단편 소설이다.

여행사에 다니는 마흔 살의 유부남 노먼은 스물여덟 살의 약국점원 마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런던 패딩턴 역에서 늘 아쉬운 이별을 하던 그들. 아주 우연히 역 구내에서 이어져 있는 호텔 문을 발견한 노먼은 건물 이 층에 있는 아늑하면서도 고급스런 공용 욕실에 다다른다. 이후 노먼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것 같은 은밀한 그 곳으로 마리를 초대한다. 가난한 연인들의 이 금지된 장난은 거리의 노래가 엘비스 프레슬리에서 비틀즈로 넘어갈 때까지 3년 간 계속해서 이어진다. 물론 1960년대 이야기이다.

또 하나의 기차역 연애 이야기가 있다. 데이빗 린 감독의 1945년작 <밀회>는 ‘아무 것도 저지르지 않은’ 두 남녀의 이야기다. 사실 주인공들은 충동과 격정에 사로잡혀 있지만, 성적으로는 저지르지 않는(unconsummated) 관계다.

▲ <밀회 Brief Encounter> 감독 데이빗 린 (1945, 영국)

매주 목요일 알렉은 오후 5시 40분 기차를, 로라는 5시 43분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주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영화도 보고 교외로 드라이브도 가는 두 남녀. 이 영화에서 가장 에로틱한 장면은 기차 플랫폼 밑으로 나 있는 어두컴컴한 지하도 벽에 비친 두 남녀의 검은 실루엣이었다. 지상의 플랫폼이 규범과 질서의 세계라면 습기가 잔뜩 배어있는 지하도는 충동과 일탈의 세계로 비춰진다. 로라가 갑자기 출발하던 기차에서 뛰어내려 지하도로 뛰어 내려가던 장면은 그녀가 스스로의 욕망에 대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내러티브는 로라의 고백으로 시작되고 종결된다. 고백이란 행위는 결코 평등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지은 자나 지위가 열등한 자의 것이라는 점에서 로라의 고백은 2차 대전 이후 영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자기부정이나 개인의 희생이라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주로 기차로 출퇴근을 하는 영국인들이기에 가능한 로맨스들이다. 마지막 기차가 떠나면 소란스럽던 역 주변의 펍(pub)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없다. ‘우리의 시대는 그들의 시대보다 진실하다’라는 어느 핸드폰 광고 문구처럼 영화 속, 소설 속 그들은 그저 먼 ‘그들’같다.

하지만 내가 아쉬운 부분은 이 점 뿐만이 아니다. 기차를 타고 가뭇없이 떠나간 그들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기차역의 사라지는 정취 또한 그리워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현대 사회의 기차역은 문화인류학자 마크 오제(Marc Augé)가 말한 대로 비공간(Non-places)이 되어 버렸다. 공항, 대형슈퍼마켓, 고속도로 등에서 우리의 주체성이나 타인과의 관계 따위는 일시적으로 사라진다.

▲ 오정호 EBS PD
대신 우리는 여행자, 구매자, 운전자라는 관습적이고 규범적인 역할 놀이에 빠진다. 나도 우리도 없다. 역(station)의 본래 뜻은 머무르고 쉬어가는 곳이지만, 사람들의 물결은 쉬지 않고 흐른다. 오히려 역 플랫폼에서의 기다림을 불편해하고 괜히 뒤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경계한다. 이젠 기차역이 사랑의 공간이 될 가능성도, 옆 좌석에 있는 그가, 또는 그녀가 로맨스의 상대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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