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처럼 촘촘하게 글을 옮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PD의 사생활②] 번역가 김현우 EBS PD

“니콜 크라우스가 인물들 사이의 어긋남을 그렇게 ‘사랑하는 이’의 시선에 따라 보고 있다는 점이 바로 이 소설의 힘이다. (중략) 그녀의 소설이 그토록 많은 골수팬들을 확보한 것은, 이러한 어긋남이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 니콜 크라우스 <그레이트 하우스>의 옮긴이 말 중에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연출자이면서 번역가인 김현수 EBS PD. 번역가로서의 삶을 묻는 질문에 김 PD는 하루 일과 중 일부인 듯 담백한 답변으로 마무리했다. 김 PD의 말마따나 ‘번역’은 심심할 때 손 놀리기 좋은 ‘뜨개질’과 매한가지라는 것. 2002년 EBS에 입사해 <시네마천국>, 다큐멘터리 3부작 <성장통>, <지식채널e>, <다큐프라임-생명, 40억년의 비밀>등을 연출한 김현우 EBS PD를 지난 2일 오후 서울 도곡동 EBS 본사 내 카페에서 만났다.

▲ 번역가 김현우 EBS PD ⓒPD저널

10년. 김 PD가 번역가로 나선지 어느새 10년을 넘겼다. 인문·예술서적을 비롯해 추리소설 등 출간된 책만 해도 20여 권을 훌쩍 넘어섰다. <그레이트 하우스>, 존 버거의 <행운아-어느 시골의사 이야기>, <A가 X에게-편지로 씌어진 소설> <머니-한 남자의 자살 노트>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로라, 시티> <G> <세계명화의 비밀> 외에도 다수 있다.

김 PD에게 번역이 일상의 일부가 된 만큼 설렘보단 담담함이 자리했고 부담감은 덤으로 얻었다고 한다. “이제 번역은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편인데 거절도 많이 하는 편이죠. 전문 번역가가 들으면 사치라고 하겠지만요.(웃음) 솔직히 시간도 넉넉지 않고,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앞으로는 잘할 수 있는 작품 위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생활고. 번역에 나선 이유는 의외로 명확했다. 생활비 마련이다. 다행히 김 PD는 학창시절부터 ‘언어’에 대한 거리낌은 덜 했다. 언어의 구조와 문법, 성격이 다르다는 점에서 김 PD는 재미를 느꼈다고 한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번역 일을 해왔고 비교문학을 전공하던 대학원 시절에서야 본격적으로 번역 일에 뛰어들었다.

“당시 생활고 때문에 돈이 필요했죠. 막상 할 수 있는 걸 찾다보니 번역을 시작하게 되었고요. 처음 번역한 책이 <웬디 수녀의 유럽미술 산책>이었는데 그 뒤론 출판사 쪽 아는 친구들도 있고 알음알음 해온 게 지금까지 이어진 셈이죠.”

김 PD는 번역을 몰아쳐서 하기보다 진득하게 하는 편이다. 예컨대 규칙적으로 일주일에 20페이지씩 나눠서 진행한다. “번역을 일로 여기지 않으니까 휴가 때도 하긴 하는데 평소엔 시간을 쪼개서 번역해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에 걸쳐 작업을 하죠.” 이 와중에 프리랜서가 살아남는 법으로 마감 지키기를 들었다. “내가 언제 ‘을’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며 을의 자세로 돌아가는 게 중요하죠”(웃음)

뜨개질과 궁합. 김 PD는 번역을 두고 한 코 한 코 뜨는 ‘뜨개질’에 비유했다. “번역 작업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혼자서 할 일 없이 있을 때면 뜨개질처럼 번역하는 게 제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마냥 쉽지만은 않다. “원서 그 자체로 읽을 때는 단어 하나 몰라도 추측하고 넘어가지만 번역할 때는 일일이 다 찾아야 하잖아요. 완결된 우리 문장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그럴 땐 왜 한다고 했을까하는 생각도 들죠.”(웃음)

또 번역에 있어서 원저자와 역자 사이에 궁합이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 PD는 “부담감은 늘 있지만 이와 별개로 번역하는데 힘이 덜 드는 작품이 있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문장(문체)을 쓰는 작가가 있다”고 밝혔다. 김 PD는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 작가로 미술 평론가인 존 버거, 소설가 니콜 크라우스를 꼽았다.

▲ 김현우 EBS PD가 번역해 출간된 서적들. ⓒPD저널

직역. 번역가 김PD는 작품에 간섭하지 않는 편이다. 원문을 그대로 살리는데 중심을 두고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소설은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문체’라는 게 있잖아요. 실용서적과 문학작품의 교정은 달라야죠. 예컨대 피동형은 능동형으로 바꿔야 한다는데 사실 영어에서 피동형은 무언가를 표현하는데 굉장히 훌륭한 수단이 되거든요.”

아울러 김 PD는 번역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원어 외에도 우리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원서를 읽으면 대충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막상 한 문장씩 옮기려고 할 땐 어렵다”며 “(누군가) 번역을 하고 싶다면 영어보다 오히려 우리말 표현에 대해 더 공부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자신도) 번역하면서 우리말 표현을 공부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강추. 이처럼 김 PD가 텍스트에 예민한 만큼 문장을 곱씹을수록 좋다고 여겨지는 작가가 있는지 혹은 추천할 만한 작품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서슴없이 니콜 크라우스, 존 맥그리거 그리고 존 버거의 <제 7의 인간>을 꼽았다.

“존 맥그리거의 문장을 보고선 굉장히 반가웠죠. 절대적으로 문장이 좋다기보다 저랑 잘 맞는 작가인 셈이죠. 저는 머뭇거리는 문장을 좋아하거든요. 너무 자신감 있게 말하지 않고, 쉼표나 줄임표가 많은 문장들이 있잖아요. 일컫자면 만연체...”(웃음)

<제 7의 인간>은 독일이나 스위스로 노동하러 간 이주 노동자의 이야기를 묶은 책이다. 김 PD는 “개인의 사연들을 일일이 이야기하지만 전체 세계경제 시스템이 녹아있다. 추상적이지 않게 와 닿는 점이 좋다”고 말했다.

PD의 사생활. 마지막으로 번역 작업이 PD로서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영향을 미치느냐는 질문에 그는 “솔직히 없다”라고 ‘솔직한’ 답변을 했다. 김 PD는 “PD와 번역가는 두 트랙으로 동시에 진행되지만 완전히 다른 것 같다”고 밝힌 뒤 “PD는 조직의 일원이지만 번역은 개인적인 작업이니 그 성격 때문에 서로 보완되는 지점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PD는 PD이자 번역가로서의 사생활에 대해 덧붙였다. “내가 나눠져 있을 때, 한 쪽이 어그러지면 다른 쪽에서 위로를 받을 수도 있죠. 제가 운이 좋게도 번역을 계속 해올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람마다 각자 하나씩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걸 잘 키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1년 6개월에 걸쳐 <다큐프라임-생명, 40억년의 비밀>의 제작을 마치고 잠시 휴식에 들어간 김 PD. 번역 작업 자체가 시작하면 지칠 정도로 체력을 요하는지라 당분간 일을 줄이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이미 또 다른 책들이 김 PD 책상 위에 펼쳐질 예정이다. 내년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 셀린저의 전기와 존 버거의 신작에 대한 번역 작업을 이어나간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