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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게

이 좌상(사진)을 한 번 보아라. 여차 저차 며칠을 머물게 된 멕시코고원의 한 박물관에서 불쑥 맞닥뜨린 아스텍의 조각상이다. 두 손만 뒤로 했으면 와상인지 좌상인지가 애매할 포즈의 이 고대인을 대면한 순간, 나는 뭔지 모를 강렬한 느낌에 휩싸였다. 이 상의 주인공은 꽃과 노래의 신이고 영혼의 수호자인 소치필리(Xochipilli) 신(神)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자꾸 사실과 다른 엉뚱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신이 아니라 떨고 있는 한 인간으로만 보였다.

이 이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토록 원초적인 자세와 표정을 만들어 낸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 자의 앞에 있는 것은 경외(敬畏)였을까, 아니면 공포였을까? 그랬다. 몇 개의 섬광같은 이미지가 흘러갔다. 정수리 위로부터 고원(高原)의 한 인간에게 쏟아져 내리는 강렬한 정오의 태양, 아니면 그의 모든 것을 앗기 위해 칼날을 겨누는 적(賊). 아니 어쩌면 더 스토리 있게, 창조주이신 태양신의 영광과 그 후예들의 안녕,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현세의 권력인 자신을 위해, 이 번에는 네가 희생(犧牲)이 되어 주어야겠다, 위협하는 사제(司祭).

그러나 어떤 경우였던가가 내겐 그리 중요하진 않구나. 다만 그를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저 눈, 입, 손, 발.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하고 처절하게 위를 향해 고개를 쳐든 저 자세를 보아라. 그 공포를 보아라. 보이지 않느냐.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 일체의 다른 계산이 스미지 않은 오롯한 감정. 극한의 공포를 볼 수는 있어도 조그만 비겁을 찾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람이다. 그가 천 년을 넘어 아직 살아 있는 이유이다. 저 살아 있음이, 죽음의 경계에서 요동하고 있는 심장의 뜨거운 피가, 나로 하여금 이 상상의 고대인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고통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살아 있는가, 묻게 한다.

아아, 왜 나는 저 꽃과 봄과 노래의 신 소치필리 상을 보고 정반대의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혹시, 신의 영광을 위해 이 신상을 만들어야 했던 한 고대인의 고통이 그대로 석상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 해가 기울고 있다.

사는 일이 힘들지 않는 때가 얼마나 있겠냐마는, 지난 두 해 너는 너무도 힘들었구나. 네가 PD라는 이유로 감당해야 했던 현실이, 어쩌면 저 좌상(坐像) 속에 숨어 있는 한 인간이 감당해야 했던 운명과 비슷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눈에 너는, 울분으로, 외침으로, 행동으로, 때론 자학으로 살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애써 외면하는 불합리와 몰상식에 너는 쉽사리 타협하지 않았다. 무사와 안일, 체념과 순응은 네 삶의 자세가 아니었다.

거대한 석제 아스테카력(歷)의 중앙을 차지한 태양의 신이자 생명의 신은 양손에 각기 팔딱이는 심장을 뽑아 움켜쥐고 있더구나. 희생은 잔인한 제의(祭儀)였으나, 대지는 그 피로 생명을 잉태하고, 만물을 기르고, 마침내 문명을 일구었다. 그러니 아스텍, 마야, 이 수수께끼 같은 문명은 결코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저 한없이 감당하는 자의 심장에서 온 것이 아니겠느냐.

▲ 이근행 전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
저 고대인을 공포로 몰아넣은 야만적 폭력과 음흉한 권력은 얼핏 역사의 주연인 듯 보여도 결국 한낱 조연일 뿐이다. K야, 나의 상상은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해도, 넌 지금껏 정직했다.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너는 지금 내가 불쑥 맞닥뜨린, 심장이 팔딱거리며 살아 있는 또 하나의 좌상이다. 너의 자세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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