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미안합니다, 82년생 지훈이 여러분”
상태바
[PD의 눈] “미안합니다, 82년생 지훈이 여러분”
  • 송현욱 KBS 드라마 PD
  • 승인 2011.12.07 14: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현욱 KBS 드라마 PD

젊음과 낭만과 자유의 상징, 소비문화의 주인공, 사회 변혁의 선봉대여야 할 청춘.
그러나 현실은 생계형 알바, 묻지 마 취업, 학자금 빚잔치.
유신의 아들도 광주의 아들도 아닌, 88만원의 아들들은
오늘도 생활 정보지를 주워들고 거리를 헤매고 있다.
- KBS 〈드라마스페셜-82년생 지훈이〉 기획의도 中

〈82년생 지훈이〉는 너무나 평범한 30살 주인공의 일상을 담은 소박한 대본이었다. 살인, 불륜, 납치, 죽음을 오가는 사랑 등 자극적인 소재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드라마 시장에서 이런 밋밋한 스토리가 호응을 불러 올 수 있을까 우려들이 많았다. 주인공의 극적인 성공담도, 88만원 세대에 보내는 가슴 뭉클한 희망의 메시지도 없이, 관조적인 시선으로 82년생 지훈이의 일상을 지켜보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송 다음날 인터넷 기사와 트위터를 비롯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88만원 세대의 슬픈 자화상을 그려 청춘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사실 주인공 지훈이가 고군분투하는 내용은 열 살이 더 많은 72년생인 나로서는 공감이 되지 않았다. 우리 세대는 누구나 저렇게 살지 않았나. 저 정도 현실에 힘겨워하는 지훈이와 그런 지훈이에 공감하는 청춘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안철수 교수와 박경철 원장이 ‘청춘콘서트’를 할 때 대학생 청중에게 하는 첫 인사말이 “미안합니다”라고 한다.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 능통한 세대’인 지금의 젊은이들이 한국 현대사에서 꿈조차 꾸지 못하는 최초의 젊은 세대가 되었다는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기성세대로서의 자기 반성문일 것이다.

대학시절 우리들은 술 한 잔 들어가면 “역사 앞에 부끄러운 죄인은 되지 말자”는 낯간지러운 다짐을 너무나 진지하게 하곤 했었다. 우리의 지훈이가 지금 그런 얘길 한다면 덜 떨어진 화성인 취급을 받을 것이다. 지훈이는 살인적 고교 입시에 휘둘리고, 대학에 와서는 좋은 전공을 갖고자 학점벌레가 된다. 전공이 정해지면 취업준비에 들어가고, 졸업 후 3~4년 뒤 취업이 된다. 그것도 비정규직으로. 그때부턴 정규직이 되기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

수도권에 집 한 채 마련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게 최고의 꿈인 82년생 지훈이. 우리는 독재에 저항하고 이 땅에 민주화를 이루고자 몸 바쳐 투쟁했는데, 너흰 겨우 반값 등록금 투쟁도 제대로 못 하냐, 너희 밥그릇도 제대로 못 지키느냐고 빈정대던, 어느새 기성세대가 된 나의 교만과 무관심이 지금의 현실을 불러오지 않았을까. 내가 누리는 조그마한 기득권도 이 땅의 ‘호구’인 지훈이 세대들의 피와 땀을 착취한 결과가 아닐까.

 

▲ 송현욱 KBS 드라마 PD

 

<사랑이 꽃피는 나무〉, 〈우리들의 천국〉, 〈내일은 사랑〉등 내 어린 시절 드라마 주인공들은 모두 대학생들이었고, 젊은 20대였다. 이제는 드라마에서마저 변방으로 물러나 전공불명의 책을 들고 도서관을 오가는 단역급 조연으로만 묘사되는 지훈이 세대들. 이들의 일상은 너무나 평범하고 현실적이기에 소재로서 경쟁력이 없다. 아니면 우리의 드라마는 어느새 더 이상 현실을 다루지 않게 된 걸까. 드라마에는 지훈이 또래의 기획본부장과 벤처 사장들이 너무나 많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